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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Jul 02. 2024

만 스물의 단상

하얀 서리 뒤에 숨어있어

  최대한 고향을 늦게 떠나려고 버티다 남은 사람들만 모여있는 명절 마지막 날 만차 버스 내부는 순전히 육체만 가지런히 앉아있는 차분한 공간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B는 버스 창밖으로 내다본 세상이 하얀 서리로 서서히 뿌옇게 짙어져 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스 내부는 타인의 육체에서 뿜어 나오는 고약하고 찐득한 체취와 육중한 짐가방으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서리로 가려진 세상으로도 모자랐는지 버스 안 차창은 낯선 이들의 뜨거운 입김과 사람들의 훈기로 인해 더욱 희끄무레하게 변했다.

  훈기로 데워진 공기는 B의 앞자리, 옆자리, 뒤에 앉은 사람들의 폐를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옮겨 다녔다. 폐에서 폐로, 세포에서 세포로, 다시 입에서 입으로의 향연은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내쉬고 삼킨 숨을 꾸역꾸역 전달했다. 스웨터와 두꺼운 겉옷의 보온효과 때문인지, 잠시라도 몸을 붙일 여유와 공간을 침투당한 심술 때문인지 갑자기 B의 심장 주위가 화끈거렸다. 뜨거워졌다. 가만히 있으니 열은 차곡차곡 누적되어 곧 머리에 닿을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낀 B는 열기를 털어내기 위해 엉덩이를 의자에서 살짝 떼고 상체를 바로 가누었다. B는 후각이 예민한 편은 아니나, 낯선 사람들의 몸 구석구석에 잠재된 냄새는 그날따라 견디기 버거울 만큼 적응되지 않았다. 물건과 사람과 냄새와 소리로 점차 뒤덮이는 공간에서 잠이 올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애써 주의를 피하기 위해 밖이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방을 원하는 자는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 사이 희끄무레한 서리는 창틀 사이로 촘촘히 스며들어 단단히 굳어있었다.

  B는 사람들이 손에 쥐는 핸드폰의 불빛에 따라 빛났다가 어두워지는 단단한 하얀 서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검지로 창에 서린 김을 쓸어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손가락과 손바닥을 번갈아 가며 계속 지워내도 생기는 허연 흔적들 앞에서, 순간 B는 막막한 마음을 닮아 아득히 먼 창 너머의 세계를 향해 갑자기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하늘과 도로를 당장이라도 달리고픈 마음에 순간 외면해 버렸던 세계로. 버스에 올라타기 전, 그 차가운 공기와 기다림 사이로.

  발밑으로 사부작거리는 소리, 물건을 부스럭거리는 소리, 피곤함이 묻어난 깊은 코골이, 누군가의 코트에 배인 찬 공기와 음식 냄새, 달아오르는 몸속 열기, 그리고 야속한 불면증의 조합에 B는 잊고 있던 사실을 더듬거렸다. 자꾸 손가락이 차창의 서리를 지우려는 본능이 작동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B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서리가 낀 창이라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시선을 거두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주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케케묵고 찌든 냄새만을 제거하기 위해 몰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너라는 장르가 옆에 있어도 보지 못했겠지.

  버스는 검은 도로를 헤쳐 달렸다. B는 기억을 떠올렸다. 안이 시끄러우면 밖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는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험한 말을 내뱉고, 예민의 칼날을 휘두르고, 상황이 미움을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하여 상황에 속아 과거를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죽을 때까지 슬퍼하다 갈 수 있는 게 인간이란 걸. 그러나 밖 같은 차가운 서리로, 안은 더운 입김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도 바람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어서 공간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떨어져 나갈 하얀 서리란 걸. 상황에 속지 않는 법을 아는 일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차창 위에 손가락이 그러했듯 그려내고 계획하고 마음먹은 일들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는 연속 앞에서도 그 너머의 장소를 다시 그리는 일이어야 한다망각이 불안을 꽃피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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