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4년 가계부 실전후기 #돈사랑#가치 있는 소비#진짜부자#여행#추억

by 두번째지니

[12화] 120만 원짜리 가방과 1,200만 원짜리 여행의 차이


분류기호: 595 (생활과학 - 가계 관리)


언젠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돈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지폐를 구겨지지 않게 지갑에 정갈하게 펴서 보관하고, 돈을 쓸 때는 '그동안 고마웠다.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잘 쓰이고 꼭 다시 만나자' 하고 인사하며, 내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늘 관심을 가져주면 돈은 절대 그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방식

요즘이야 카드 한 장으로 결제하니 현찰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지갑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변을 관찰해 보면 돈을 대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지갑도 없이 구겨진 지폐를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다니는 사람. 번듯한 지갑이 있어도 그 안을 열어보면 지폐가 앞뒤도 맞지 않게 섞여 있고, 철 지난 영수증과 잡다한 쿠폰들이 뚱뚱하게 엉켜 있는 사람.


과연 돈이 이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숨도 쉬기 힘든 그 지저분한 공간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돈이라면,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면, '가계부를 쓴다는 것' 자체가 돈을 열렬히 사랑하는 저만의 방식이었습니다.


매일의 지출을 적고, 남은 잔액을 확인하고, 한 주를 돌아보며 내 곁을 훌쩍 떠나간 돈들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일.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2인 1조 자산 관리 시스템

돈을 예쁘게 사랑해 주기 위해, 저는 매월 말일이면 우리 집의 모든 자산을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돈: 전세금, 각종 예·적금, 청약예금, 주식 (사실 주식은 장기 투자용이라 묶인 돈이지만, 언제 닥칠지 모를 '내 집 마련'을 위해 일단 이 항목에 다른 색깔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절대 움직일 수 없는 돈: 완납한 연금보험, 부부의 연금저축펀드, 종신보험, 국민연금, 아들의 청약통장.


제 가계부에 적히는 총액은 어디까지나 '투자 원금' 기준입니다. 매일 요동치는 주식이나 ETF의 현재 가치를 가계부에 적기엔 보수적인 제 성격과 맞지 않았거든요. 내 손에 확정되어 들어오지 않은 수익은 아직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대신 남편이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남편은 매월 말일마다 주식 수익률이 반영된 우리 집의 '진짜 현재 자산 총액'을 엑셀 파일로 따로 업데이트하며 관리합니다. 저는 가계부로 현금 흐름과 원금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남편은 그 원금이 시장에서 얼마나 자라났는지 수익률을 기록하는, 완벽한 '2인 1조 자산 관리 시스템'이 구축된 셈입니다.


"그렇게 아끼다 내일 당장 죽으면 어떡할래?"

이런 생활 방식을 이야기하면 열에 아홉은 혀를 내두릅니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내일 당장 사고 나서 죽을 수도 있는데, 쓸 수 있을 때 써야지."

"너무 돈, 돈 거리면서 사는 거 보기 안 좋아."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인생, 돈이 다가 아니다~"


그럴 때면 저는 1994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의 기억을 떠오릅니다.

당시 김일성 사망으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저희 동네(은평구)에도 총을 멘 군인들이 돌아다닐 만큼 흉흉했습니다. 그때 같이 도시락을 먹던 한 친구가, 밥을 먹으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는 저를 보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야, 곧 전쟁 날 텐데. 수능도 안 볼걸? 미군이 한강 이남만 지키기로 했대. 대학 붙어도 전쟁 나면 못 다녀. 뭘 그렇게까지 공부를 하냐?" (6.25 때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을 어디서 잘못 주워들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쟁은 나지 않았고, 저는 무사히 수능을 봤고, 대학에 붙어서 잘 다녔지요.


"그렇게 아끼다 내일 당장 죽으면 어떡할래?"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이렇게 돈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온 세월이 억울할까요?


돈을 '사랑'한 게 아니라 스크루지처럼 맹목적으로 '집착'만 했던 사람이라면 억울하겠죠.

하지만 저는 돈과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해왔기에 전혀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렇게 돈을 아끼고 불려놓은 덕분에, 남겨질 남편과 아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완벽한 사랑의 결실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매월 자산을 1원 단위까지 기록하는 이유는 '집착'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내 돈을 가장 가치 있는 곳으로 기분 좋게 보내주고, 더 큰 의미로 돌아오게 만들까'를 고민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는 지출로 '여행'을 꼽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쯤 되자 주변 엄마들은 방학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남아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행을 계획했지만 제 기준은 달랐습니다.


"아들이 10시간 이상의 비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컸을 때,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에 가서, 단순한 휴양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오는 여행을 가자."


아들이 5학년이 되던 2017년, 저희는 첫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 한 나라만 깊이 파고드는 6박 8일 패키지여행이었고, 3인 가족 여행비로 총 11,665,454원을 시원하게 일시불로 결제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유적 앞에서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 엄마는 120만 원짜리 가방 살 돈은 없지만, 너에게 세상을 보여줄 1,200만 원짜리 여행 올 돈은 있다."

이듬해 아들이 6학년일 때는 북유럽 3개국을 7박 9일간 다녀왔습니다. 압도적인 대자연을 보여주기 위한 이 여행에는 13,969,338원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유산받더니 럭셔리하게 유럽 여행 다니네"라고 수군거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여행비는 유산과 단 1원도 상관없는 돈이었습니다. 아들이 2학년 때부터 식비와 잡비를 아껴가며 꼬박꼬박 모아둔 순수한 '여행비 항목'에서 나온 돈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하늘길이 막혔습니다

원래는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매년 1,000만 원 규모의 해외여행을 갈 계획이었습니다.

중1 때는 남편이 너무 바빠 12월 겨울방학에 중국 하이난 아틀란티스 리조트로 4박 6일 호캉스(5,301,160원)를 다녀왔습니다. 2019년 12월 26일 귀국했는데, 불과 한 달 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터지며 전 세계의 하늘길이 막혀버렸습니다.

중2, 중3은 코로나로, 고등학생 때는 입시로. 해외여행은 자연스레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12월이 되어서야 대만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집을 구입한 여파로 여행비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이때도 저는 3박 4일에 6,164,282원이라는 다소 비싼 여행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고작 8명이 40인승 대형 버스를 타고, 역사 지식이 풍부한 스타가이드의 밀착 설명을 듣는 만족도 최상의 여행을 즐길 수 있었죠.

원래 12명 예약이었는데 당일에 4명이 취소를 해서 8명이 여행하게 되었지요

돈과 건강한 연애를 하세요

지금 돌이켜봐도, 그 수천만 원의 여행비는 제 인생에서 가장 잘 쓴 돈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세계문화유산을 보고, 노르웨이의 대자연에서 걷고, 7성급 리조트에서 쉬고, 대만의 역사를 온전히 배웠던 기억은 저희 가족에게 영원히 닳지 않는 '추억'이라는 엄청난 자산으로 돌아왔으니까요.


저희 가족의 추억파우치입니다

돈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기록해 보세요. 잘못된 헤어짐은 없는지 늘 살펴보세요. 그리고 돈이 예쁘게 커가는 모습을 매월 가계부에 적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진짜 돈을 써야 할 '1,200만 원짜리 가치'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이고, 쓸데없는 '120만 원짜리 허영' 앞에서는 지갑이 단단하게 닫히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그렇게 살다 보면 '120만 원짜리 가방을 들어도 결코 허영으로 보이지 않는, 내실이 꽉 찬 진짜 부자'가 되어 가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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