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가계부 실전후기#펀드#ELS#경제공부#워런버핏#S&P500
분류기호: 327.8 (경제학 - 개인금융 및 투자, 재테크)
600만 원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펀드를 모조리 해지한 다음, 저는 그 길로 곧장 각성하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10년 뒤 10억 자산가가 되었을까요?
하하하.
마땅히 그랬어야 했지만, 그때의 저는 훨씬 더 어리석고 요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쿠폰 이자가 따박따박 꽂힐 거예요"
"고객님 성향에 딱 맞는 안전한 상품이 있어요."
펀드를 제멋대로 해지해 버린 저를 VIP 룸에 앉혀놓고, PB는 'ELS(주가연계증권)'라는 새로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매달 20~30만 원씩 쿠폰 이자가 통장에 따박따박 꽂힐 거예요."
그 '쿠폰'이라는 단어에 혹한 저는, ELS가 펀드보다 훨씬 안전한 예금 비슷한 상품인 줄만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ELS는 주가지수가 일정 선(Knock-in Barrier) 밑으로 폭락하면 원금의 절반 이상이 날아갈 수도 있는 초고위험 파생상품이었습니다. 제 보수적인 투자 성향과는 정반대에 있는 상품이었죠. 하지만 당시의 저는 제 투자 성향은커녕 ELS의 스펠링 뜻도 모르는 완전한 금융 문맹이었습니다.
가끔 70~80대 어르신들께 ELS를 가입시켜 문제가 된다는 뉴스를 보셨을 텐데, 저는 40대에 이해를 못해서 투자를 했지요.
'하나도 이해 못 했는데...'
그 시절 주식 시장이 좋았던 탓인지, 제가 가입한 ELS들은 신기하게도 자꾸만 '조기 상환'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600만 원 수업료를 고스란히 환불받는 행운이 찾아왔죠.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빠가 하늘에서 지켜봐 주신 걸까요.
상환이 될 때마다 은행은 저를 다시 불렀습니다. 재가입을 시키기 위해서였죠. 서류에 서명할 때면 직원이 형광펜으로 칠해준 회색 글씨를 펜으로 꾹꾹 눌러 따라 써야 했습니다.
"본인은 금융투자상품의 위험성 등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를 충분히 이해하였음."
글씨를 따라 쓰면서 저는 속으로 늘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도 이해 못 했는데...'
이 찜찜함이 쌓이고 쌓이던 어느 날, 저는 더 이상 남의 말만 믿고 피 같은 유산을 굴려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정독도서관 청소년실로 간 40대
2018년 7월 12일. 저는 종로구 정독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청소년실로 들어가 경제 책 두 권을 빌려왔습니다.
《경제학 레시피 : 틴 매경 TEST 기본서》와 《청소년을 위한 손에 잡히는 경제》
아무것도 모르는 제 수준이 딱 '중학생' 정도라고, 아주 정확하게 메타인지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날부터 제 독서 목록은 경제서로 가득 찼습니다.
2019년 12월까지, 저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경제 지식을 닥치는 대로 흡수했습니다.
《머니: 새로운 부의 법칙》 《꿀잼 경제학》 《백만장자 불변의 법칙》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월급쟁이 부자들》 《부의 추월차선》…
책을 읽다 보니 무서운 경고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돈을 너무 많이 풀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조만간 거대한 금융 위기가 온다."
만약 경제 위기가 와서 주가지수가 반토막이 난다면? 제가 가입한 ELS들이 상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만기를 맞이하면, 원금은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벼락처럼 내리친 한 페이지
그리고 어떤 책에서인가, 제 인생을 완전히 구원해 준 '운명의 일화' 하나를 읽게 됩니다.
바로 '워런 버핏의 10년 내기' 이야기였습니다.
헤지펀드 VS S&P 인덱스펀드 10년 내기 결과는? (2008년 1월1일 시작 - 2017년 12월 31일 끝)
워런 버핏은 헤지펀드에게 "10년 동안 S&P 500 인덱스보다 높은 수익을 내는 펀드가 있으면 100만 달러를 준다!" 는 제안을 했다.
위의 내기에 프로티지 파트너스의 설립자인 테스 사이즈가 응하면서 내기는 성립되었고 내기가 성사되고 버핏은 뱅가드의 인덱스 펀드를, 프로티지는 헤지 펀드에서 제공하는 5개의 펀드를 선택했다. 내기가 시작되고 약 5년간은 프로티지가 내기에서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워런 버핏이 투자한 S&P 인덱스펀드는 연간 7.1%의 수익을 보였으며, 테드 사이즈가 고른 헤지펀드의 누적 수익률은 수수료를 제하면 2.2%에 불과하여 워런 버핏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 한 페이지가 제 머릿속을 벼락처럼 내리쳤습니다.
'S&P 500 인덱스 펀드가 뭔진 모르겠지만, 저걸 해야겠다!'
VIP 룸과의 굿굿바이
얼마 뒤, ELS가 또 조기 상환되었다며 PB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늘 가던 VIP 룸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상환금을 ELS에 재가입하는 대신, 전액 'S&P 500 인덱스 펀드'에 넣겠다고 단호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들은 PB의 반응이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제가 물어본 인덱스 펀드에 대한 설명은 쏙 빼고 다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더니, 뜬금없이 두툼한 보험 상품 설명서를 제 손에 쥐여주며 집에 가서 고민해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수수료로 먹고사는 은행에서, 수수료가 거의 없어 돈도 안 되는 인덱스 펀드를 꼬치꼬치 문의하다니. 은행의 생리를 전혀 몰랐던 저의 순진한 무지를 탓해야 할까요.
이제 VIP 룸과 굿굿바이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을 직감했습니다.
정독도서관 청소년실에서 빌려온 경제 책으로 시작된 막막했던 공부가, 마침내 제 자본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거대한 방패로 진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