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4년 가계부 실전후기 #전세난민#빌라전세#무주택자#집걱정

by 두번째지니

[5화] ‘전세 23년’ 전세 난민의 기록

그래도 이사는 딱 1번. 천운이었습니다!


분류기호: 597.1 (주거학 - 주택의 선택 및 관리)


2002년, 신혼의 단꿈을 꾸며 들어간 첫 집은 새절역 4번 출구에서 뛰면 1분 컷인 다가구 주택이었습니다.

전세금 3,500만 원 중 1,500만 원이 대출이었던 그 13평 남짓한 공간에서, 무려 8년을 버텼습니다.

8년 동안 전세금은 5,500만 원으로 올랐지만, 열심히 빚을 갚고 모은 덕분에 저희 수중에는 전세금 포함 1억 6천만 원이라는 피 같은 종잣돈이 쥐어져 있었죠.

카본지(먹지)를 사용한 복사식 계약서. 지금보니 고문서같네요^^

드디어 이사, 그리고 햇빛

2010년 2월, 드디어 첫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목적지는 전세금 1억 4천만 원의 신축 빌라 5층. 엘리베이터는 없었지만, 13평에서 21평으로 평수가 넓어졌고 무엇보다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지난 8년간 반지하도 아닌데 볕 안 드는 집에서 살며 얼마나 해를 그리워했던가요. 게다가 집주인이 갭투자로 분양받은 새집이라 당분간 쫓겨날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마냥 행복했습니다.

전세 계약하실 때 특약사항 2번은 꼭 넣으세요!

도보 3분 거리에 새로 생긴 초등학교(병설유치원)가 있고, 5분 거리에 이마트, 7분 거리에 지하철역과 불광천이 있는 이른바 '슬세권'이었습니다. 터가 좋았던 탓일까요? 저는 이 집에서 무려 15년을 내리 살게 됩니다.

다음 이사는 무조건 '내 집'을 사서 나가리라 굳게 다짐하면서요.


하지만 남의 집에 산다는 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롤러코스터 같은 고비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고비 — 보름 전 기습 통보

이사 온 지 딱 2년 만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집주인 연락 없으면 묵시적 갱신이니까 그냥 조용히 살아"라고 하길래, 콧노래를 부르며 계약 만료일만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만기를 불과 보름 앞두고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온 겁니다. 전세금을 올리겠다고요.


법적으로 따지면 통보 기간을 어긴 거라 싸워볼 수도 있었지만, 저희는 계속 살고 싶었습니다. 결국 1,000만 원을 부르는 주인을 달래어 800만 원 증액으로 합의를 봤죠. 늦게 연락한 대가로 200만 원을 깎은 셈입니다. 2년 뒤에는 아예 제가 먼저 선수 쳐서 1억 6천만 원에 재계약을 맺었습니다.


두 번째 고비 — 집을 팔겠다는 청천벽력

2015년 가을의 어느 날, 멀리 살던 집주인이 보낸 부동산 중개인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집을 팔겠다는 통보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의 전학을 막기 위해 동네를 이 잡듯 뒤졌지만, 마땅한 전셋집이 없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달이 넘도록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자, 중개인은 "1억 9천만 원에 전세 재계약하시는 게 어떠냐"라고 슬쩍 제안했습니다.


얼씨구나 좋았죠. 그런데 중개인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집주인과 저 사이를 '중개'했다며 수수료 62만 7천 원을 당당히 요구하는 겁니다. 황당했지만 이사 비용 아꼈다 치자며 쿨하게(?) 지불했습니다.


하지만 찜찜함은 남았습니다. 집주인이 2억 4,500만 원에 산 집에 1억 9천만 원 전세로 살고 있다니. 대출 없는 집이라 깡통전세는 아니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내 집'이 아니면 결국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세 번째 고비 — 코로나 시국의 진짜 지옥

2021년 가을. 이때는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들이닥쳤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면 온 집안에 소독약을 뿌리며, 언제 팔릴지 모르는 집에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견뎠습니다.


결국 집은 2022년 1월 2억 4,900만 원에 팔렸고, 저희는 아들이 배정받은 고등학교 근처로 이사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고등학교 코앞에 집을 얻을 작정이었죠.


남해 다랭이 마을에서 걸려온 전화

2022년 2월. 항상 가던 아들 생일 기념 가족 여행. 아름다운 남해 다랭이 마을을 걸으면서 집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새 주인이 실거주 안 하고 전세를 놓는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곧바로 "제가 계속 살겠습니다!"를 외쳤죠. 아들이 무사히 고등학교 3년을 마칠 수 있도록 계약 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집값보다 무려 100만 원이나 비싼 2억 5,000만 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제 인생 마지막 전세 계약서

새 집주인도 저희를 아주 반겼습니다. 집 보러 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집 상태에 감탄했기 때문이죠.

저는 사실 청소는 게으르지만 정리 정돈은 꽤 하는 편인데, 12년 된 빌라를 본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극찬하더군요. 화장실을 보면 다들 "새로 수리하셨어요?"라고 물었으니까요. 제 눈엔 찌든 때만 보이는데 하도 극찬을 하길래,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다른 집들은 화장실 벽에 똥이라도 발라놓고 사나?'


계약서를 쓰던 날, 공교롭게도 새 집주인의 아들도 저희 아들과 동갑인 예비 고1이었습니다. 이를 안 중개인은 원래 2월이던 만기를 (2월은 정신없다며) 아이들 대학 입학 후인 2025년 3월로 맞추자고 제안했죠.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 소소한 배려 하나가, 3년 뒤 제가 생애 첫 내 집을 마련할 때 얼마나 엄청난 행운의 씨앗이 될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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