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로 등극하고 사주팔자를 탓하며 결국 난 전업주부로 남기로 했다. 그래도 그 삶도 나름 괜찮았다.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내 시간도 적절히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경단녀란 걸 알게 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그건 사회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어쩔 수 없이 사회와 단절 됐다지만 내가 하는 사회생활은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였기에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며 사회 이슈를 확인했다. 그게 내 생활에 큰 도움과 쓸모를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알 권리를 행사하는 것 같아 나름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도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소파에 앉아 여느 때처럼 기사를 검색하며 주요 사건과 사회 이슈를 살펴보던 때였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넘겼을 법한 그 기사가 눈에 들어온 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검정고시 최고령 합격. 할머니, 새내기 되다.’
커다랗고 진한 글씨로 기사 제목이 쓰여 있었다.
‘연세가 몇이시길래 최고령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최고령이란 단어였다. 첨엔 연세가 궁금했고, 그 담엔 할머니의 사연이 궁금했다. 그래서 난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기사의 주인공은 충북 제천에 사시는 장 씨 할머니로, 할머니 연센 85세셨다.
‘우와, 제천 분이시네!’
난 그때 알았다. 학연, 지연, 혈연이 왜 무섭다고 하는 지를 말이다. 할머니께서 내 고향인 충청북도에 사신다는 것만으로도 내 어깨가 올라가며 더욱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머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고, 못내 아쉬워 중졸 검정고시를 준비해 최고령 합격자가 되셨다고 했다.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합격하시며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셨고, 오랜 시간 실패와 도전을 반복한 끝에 결국 최고령의 나이로 대학교에 입학하시며 할머니의 오랜 꿈을 이루셨다고 했다.
‘나도 책상에 한두 시간만 앉아 있어도 힘든데 할머니 정말 대단하시다!’
아직 젊은 나도 책상에 앉아 책이라도 볼라치면 얼마 되지 않아 허리가 아프고, 목도 뻣뻣하건만 할머닌 그 연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들어도 참고 견디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기사에도 할머닌 만성 관절염으로 인해 공부하는 게 쉽지 않으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더욱 오래 걸리셨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정말 많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닌 포기하지 않으셨고, 당당히 꿈을 이루어 내셨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미소가 환히 빛나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계셨음에도 입학증서를 들고 계신 할머니 미소가 마스크를 뚫고 나와 세상 모든 것을 얻은 양 정말 행복해 보이셨다.
‘우리 엄마도 대학교에 대한 미련이 많으신데…….’
물끄러미 할머니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은연중 엄마가 생각났다. 평소 대학교에 대한 미련을 많이 내비치던 엄마였기에 엄마도 기사 속 할머니처럼 꿈을 향해 도전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만 몇 달 전 디스크가 신경을 눌러 허리 수술을 받으셨다. 연세도 많으신 데다 당뇨까지 있어 위험한 수술이었지만 걸음을 걸으실 수 없었기에 수술이 불가피했다. 결국 엄만 허리 수술로 인해 평생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일을 못하게 되셨다.
자식들 입장에선 그만했으면 하는 일을 멈추게 되어 홀가분했지만 엄만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우울함과 무료함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계셨다.
난 그런 엄마께 의욕을 드리고 싶어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 하셔?”
“엄마 그냥 있지 뭐. 텔러비전 보고 있었어.”
평소와 같은 일상의 대화를 나누다 기사에서 봤던 할머니 사연을 말씀드리곤 엄마께 물었다.
“엄마도 공부해 볼 생각 없어? 늘 아쉬워하셨잖아. 슬슬 공부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의욕도 생길 테고.”
엄만 잠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곤 힘없는 엄마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이제 엄만 자신 없어. 너무 늦었지. 성경 책 조금만 봐도 눈이 시큰거리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겠어.”
엄마 말이 맞았다. 수술로 체력도 약해지시고 더욱이 시력까지 나빠져 엄만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눈물이 난다고 평소에도 말씀하셨다. 엄마 나이대에 공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85세의 연세로 대학교에 입학하셨다는 할머니 사연이 기사화 됐을 테니 말이다. 그걸 알기에 엄마께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럼 안 하면 되지 뭐.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시는 거죠, 박여사님?”
난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고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로 수다를 떨다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였다.
“막둥이는? 막둥이는 해 보고 싶은 거 없어?”
엄마가 내게 물으셨다. 그리곤 하고 싶은 게 있음 젊을 때 하라고, 나이 먹음 겁도 많아지고 하는 것도 힘들어진다며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을 내비치셨다.
하지만 엄마의 물음에 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뭐였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래보다 현실을 빨리 알았기에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늘 현실과 타협 후 결정됐다. 그래서인지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게 뭐였는지 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난 얼버무리며 엄마와 전화를 끊었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한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뭐였었지? 간절히 바라던 내 꿈은 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