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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뛰르 Oct 11. 2024

아드리안 보호자님

─ by Mr. Choi




  사십만 원. 후원회의 주도적인 모금 활동 결과가 내 손에 쥐어졌다. 제법 두툼했다. 봉투에 반강제적인 권유와 시선 압박을 못 견뎌 오만 원을 넣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에게 번민을 안겨주고 자기는 나 몰라라 쏙 빠져버린 새끼 길냥이 최초 발견자. 먹을 것을 주며 잠깐 데리고 놀다 밖에 내놓으면 그만인 일을 두고 야단법석을 떠는 우리를 쳐다보며 그는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다. ‘새끼길냥이대책최고위원회’를 ‘아드리안후원회’로 개칭한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업을 성공리 마무리하고 싶은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이 그를 둘러쌌기 때문이다.     


  “한 장 할 거예요? 두 장 할 거예요?”     


  벌어진 지갑, 만 원권 지폐가 팔랑거리려다가 멈췄다. 내려다보는 시선들이 일제히 말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뒷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자신들도 모른다고. 그는 얼른 신사임당으로 바꾸어 내밀었다. 그녀와 헤어지기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면서. 억울함을 애써 억누르면서.     


  생명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에게 일침을 가하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서너 시간의 노동과 교환된 가치는 사료로 바뀔 테고, 아드리안 체중은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이 돈이 뼈와 살의 일부분이 된다는 생각에 이르자 충만함이 밀려왔다.     


  같은 가치라도 차이가 있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 있었다. 키보드 아래에서 잠든 그것을 조용히 깨웠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 보탠다는 메시지가 일어났다. 포스트잇 정갈한 글씨체의 주인공은 같은 층 다른 부서 직원. 나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가로젓던 고개를 바로 하고 두 눈을 감았다. 빳빳한 다섯 장의 지폐를 천천히 넘겼다. 묻어 있는 체온을 손끝에 옮겼다. 여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삼십만 원을 목표로 타깃 모금 활동을 벌인 후원회는 초과 달성을 자축하고 즉시 해산했다. 중성화수술 비용을 마련했으니, 이제 날짜를 잡을 차례.     


  “아들, 아드리안 보호자님?”   

  

  이동장 한쪽 벽에 몸을 밀착하고 있는 고 양을 달래려고 허리 숙인 채 팔을 길게 뻗고 있었다. 낑낑거리는 개 울음이 거슬리는지 때때로 송곳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하악, 거친 숨을 내뱉었다. 동물병원 대기실 구석 소파에 쭈그려 앉아 나도 낑낑거렸다.   

  

  “아드리안 보호자님, 안 계세요?”     


  간호사가 목청을 돋웠다.  

   

  “아, 네!”     


  그제야 진료카드 이름을 수정한 게 생각났다. 공식적인 이름을 공개 장소에서 처음 불리던 순간, 아드리안은 공식적인 나의 동거묘가 되었다. 그래서 그날을 잊지 못한다. 게다가 대여섯 명의 보호자 시선을 한꺼번에 받아봤으니까. 그들은 일어서는 나와 덜컹거리는 이동장을 번갈아 보았다. 가느다란 세로 형태의 작은 틈만 허용한 디자인은 상상을 불러오는 능력이 탁월했나 보다. 저마다 고양이를 그려낸 시선은 진료실 안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 아줌마가 기어이 다가왔다.     


  “귀한 고양이를 분양받았나 보다, 어떤 품종이에요?”     


  “그런 거 잘 몰라요, 저는.”     


  “우리 애는 러시안블루. 오 년 전 무지개다리 건넌 애는 페르시안. 이래 봐도 집사 23년 찹니다. 살짝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어디 보자, 에이드리언?”     


  이동장 중심이 뒤쪽으로 이동했다.     


  “……곤냥이네!”     


  현지 발음에 가깝게 이름을 부르느라 혀가 꼬였을 수도 있다고 아드리안에게 귓속말로 전해줘야 했다. 네 모습을 보고 당황한 게 아니라.     


  아기 웃음소리를 지나치지 못한 아줌마, 유모차에 가까이 다가가서 호들갑을 장착한 목소리로 묻는다. 몇 살이에요? 차양 아래쪽을 한참 보고 나서, 아기네! 뒤늦게 억지 감탄을 만드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살다 보면 예쁘다, 귀엽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곤란해지는 순간도 있겠지 싶으면서도 내 일이 되면 속상한 법이다.     


  코리안숏헤어. 고등어태비. 또는 길냥이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진찰 데스크 위에 웅크리고 있다.     


  “아드리안을 꼭 수술시켜야 할까요?”     


  “안쓰럽겠죠. 그 마음 압니다. 그러나 상생하기 위해선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결과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은 확실합니다. 습관적 임신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새끼를 돌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지자체에서 길냥이 TNR 사업을 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보셨죠? 귀 끝이 살짝 잘려 나간 아이. 수술했다는 표식이지요.”     


  “배를 꿰맨 흔적만 남기고 귀 끝 커팅한 사진을 제출해서 수술비 지원비 받다 적발된 뉴스도 봤죠. 필요한 건 알겠는데…… 얘가 스스로 선택했으면 좋겠는데…….”     


  “직장인이니까, 내주 토요일 3시 어떠세요?”     


  수술 일정표에 아드리안이 기재되었다. 그 옆 괄호 안에는 월령과 암컷 생물학적 기호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해 질 녘이다. 고 양, 수술받을래? 미야웅. 수술 안 받을래? 미야웅. 개복 수술이니까 꽤 아프겠지? 전화해서 취소해야 할까? 가급적 성적으로 조숙해지기 전에 끝내야 덜 힘들다는데…… 나중에 했다가 몸이 더 축나는 거 아니야?     


  “고 양, 그래 이리 와보렴. 지금부터 하는 말 똑바로 들어. 너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단다. 네가 원하는 삶을 네가 직접 선택했으면 좋겠어. 1번. 수술을 받지 않고 나간다. 근사한 수컷 고양이와 연애도 하고, 새끼도 낳을 수 있단다. 그러나 네 새끼들을 혼자 힘으로 길러야 할 거야. 네 남잔 오래전에 떠나고 없을 테니까. 물론 새 남자친구를 만날 확률은 매우 높지. 2번. 수술을 받고 나와 함께 이 집에서 계속 산다. 알다시피 네 뒷바라지 내가 다 하고 있잖니. 충분히 고민하길 바란다. 7일 후 정오까지 나가거나 그냥 있으면 돼. 수술 전날 저녁은 금식이니까 때가 되었는데 밥을 안 준다 싶으면, 서둘러 결정해야 해. 알겠지?”     


  “미야우!”     


  커튼 뒤로 사라졌다. 날카로운 울음이 귓속에 꽂혔다.     


  고 양의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집을 나섰다. 병원 문을 통과할 때까진 아드리안이라는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얼마간 용기를 내었다. 그러나 막상 수술실로 끌려갈 때는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런,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구나.     


  회복 시간까지 포함하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므로 집에서 쉬다 오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근거리에서라도 지켜줘야 했다. 그래야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쯤 붕대를 감고 있기를.     


  불안을 해소하고자 믹스커피를 연거푸 타 마셨다. 자기네 물품 축나는 광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는지 마취도 풀리지 않은 아드리안을 데리고 왔다. 코끝에 손을 갖다 댔다. 숨이 느껴졌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깨긴 했는데 다시 잠들었네요. 비교적 회복이 빠를 겁니다. 조기 수술의 강점 아닙니까.”     


  흔들리는 만큼 수술 부위에 통증이 가해지지 않을까 싶어 이동장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미리 마련해 둔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직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마를 검지로 쓸어주며 말을 걸었다. 마취가 풀리면 조금 더 아플 거야. 조금만 참아. 결국 오늘 밤도 지나가기 마련이야. 머잖아 실밥 풀러 갈 날이 올 거고. 복근을 만들어 세로 근육 사이로 수술 자국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을지도 몰라. 복근 만들기 실패해도 괜찮아. 밤새 소리 내지 않고 대지를 덮은 도둑눈처럼 어느 아침, 네 털은 수북하게 자라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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