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Ms. Go
부끄러움이 중요한 감정이라는 걸 미스터 초이가 몸으로 직접 가르쳐 줬어.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흐르면 무작정 따라 부르는데, 시끄럽다고 야단쳐도 소용없어. 청각기관이 선택적 마비 증세를 보일 때를 조심해야 해. 가수와 동일시하고 제스처까지 따라 하면 이젠 시간문제야. 몸을 사린다는 뜻이 뭔지 알지?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숨기고 절대 눈에 띄면 안 돼.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거든.
언젠간 두 앞발을 붙들리고 댄스 파트너가 되어야 했어. 숙녀한테 정중히 청하는 과정도 생략하고 말이야. 무례하기 짝이 없게! 나머지 두 다리로 서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이젠 미스터 초이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맞아, 쟤 이름이야. 자기를 그렇게 부르래. 고양이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이(~ee)’로 끝나야 호감을 보일 확률이 높다는 실험 결과를 어디서 읽었나 봐. 그리고 외국에서는 ‘최’라고 정확하게 이름을 적어줘도 십중팔구 ‘초이’라고 부르던 기억을 붙잡았고. 그래서 초이가 된 거야, 미스터 초이. 슬슬 내 이름도 궁금해지지 않니?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그리자벨라가 누군지 대번에 안다면 공연예술에 관심이 높은 관객이겠지. 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 《캣츠》에서 〈Memory〉를 부르는 고양이 있잖아. 영원할 줄 알았던 청춘과 아름다움이 떠나 버리자, 양손에 남은 늙음과 추억을 움켜쥐고 흐느끼는. 그 안에서 한 줌의 희망을 발견하는. Look, a new day has begun. 마지막 가사에 매번 안구를 헹구게 돼. 환해지는 기분이야.
1981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작품이 아직도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르고 있대. 물론 나야 관람하지 못했지. 미스터 초이가 하도 떠들어대서, 때때로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노래를 부르는 통에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니까. 가창에 소질이 쥐뿔만큼도 없다고 충고하려다가 그만두었어. 내가 아니면 누가 들어주겠니.
미스터 초이는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찾아갔다는데 배우가 하나같이 고양이와 같다더라. 특히 고양이 복장의 배우들이 객석으로 잠입해서 공연장 전체를 무대로 삼아버린 장면이 무척 흥미로웠다는군. 통로 좌석에 앉아 바로 옆에서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그저 응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등을 쓰다듬고 있더래. 나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애교 부리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흔들어서, 그 행동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서 하마터면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줄 뻔했나 봐.
몰입한 나머지 정말 그렇게 했다면 관객이 무대에 참여한 연기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까, 아니면 성추행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을까, 하고 나한테 묻기에 대답해 줬지.
“미야우 미야우, 미-이-야웅-(해 보는 수밖에 길은 없습니다.)”
할까, 말까, 선택을 앞두고 네가 고민할 때마다 주문처럼 읊조리는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틀림없는 교훈」을 내가 들려줄 때가 다 있네. 다음 기회에 꼭 해보길 바라. 아무쪼록 결과가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라.
고양이의 습성을 오랜 기간 관찰하고 연구해서 연기와 안무를 구상한 연출력도 대단하지만, 젤리클이라는 고양이 세상을 만들어 뮤지컬 무대에서 선보일 수 있게 마련한 문학적 상상력은 놀라움, 그 자체야. 원작은 소설이나 희곡이 아닌 시! 왜 있잖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엘리엇. 그의 시집 『노련한 고양이들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이 뮤지컬 역사를 바꾸어 놓은 거지.
고양이에겐 반드시 세 가지 이름이 필요하답니다
우선 가족들이 평상시 부르는 이름
(중략)
독특한 이름, 좀 더 위엄 있는 이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꼬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을까요?
어찌 그리 수염을 쫙 펴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요?
(중략)
고양이 혼자만 알고 있을 뿐,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이름
◇ T. S. 엘리엇, 「고양이 이름 짓기」 부분
시집에 실린 첫 시를 읽고 고민에 빠진 미스터 초이. 동거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돌입한 일은 바로 내 이름 짓기. 이미 불리는 이름도 있고, 미리 생각해 둔 이름도 있을 테니 금방 끝나겠지 싶었는데, 꽤 오래 고민하더라고. 어떤 근사한 이름이 떠오르길 기다리는지, 골몰하는 깊이가 그대로 미간에 드러나 꽤 심각해 보이기까지 했어.
며칠 후에야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초등학교 입학생 학부모라도 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 이름을 선포하더군. 귀찮음의 시작점이었지. 최고의 학습법은 반복에 있다는 신념을 내비치며 수시로 불리는 바람에 갓 지은 이름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어. 한 번이라도 반응하지 않으면 이름을 아직 모른다고 판단할 수 있으므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했어. 고문 수준의 학습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귀찮아도 매번 고개 정도는 돌리고 쳐다봐야 했지.
듀이 리드모어 북스. 이런 묵은 종이 냄새 풀풀 풍기는 이름이 내 것일 리 있나.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 것 같은 거물에게나 어울릴 것 같지? 맞아, 대범하게도 도서관을 접수해서 단숨에 넓은 영역을 확보한 선배님 이름이야. 한겨울에 도서 반납함에 버려진 새끼 길냥이가 미국 도서관 십진분류법으로 불리게 된 사연은 이미 전설이 되었지.
그래, 좋은 이름에는 사연이 있지. 그래서 내 이름에도 그럴싸한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지. 먼저 나의 세 가지 이름에 대해 말해줄게.
내 첫 번째 이름은, 그러니까 평상시 부르는 이름은 ‘고 양’이야. 동물병원 접수처에서 이름을 물었을 때 얼결에 정해졌지. 넷이 웅성웅성 머리를 맞대려고 하자, 간호사가 대뜸 고양이라고 적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소음 발생을 사전 차단했어. 그렇게 고양아, 고양아, 하고 불리다 미스터 초이와 상대적인 느낌이 들도록 ‘고 양’으로 고착되었을 게 분명해.
세 번째 이름부터 먼저 말할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가 지은 이름은…… 바로…… 쉿, 여기서만 말하는 거야. 그리자벨라! 어때?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맞춤복 같지 않니? 널리 알려져서 누구도 함부로 갖다 쓰기 곤란하다는 점을 바꾸어 생각해 봐. 나만의 이름으로 빛을 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그리자벨라 캐릭터를 나만큼 소화해 낼 고양이가 없다고 줄곧 생각해 왔어. 〈Memory〉는 너의 노래가 아니라 나의 노래였던 거지. 이제 알겠니, 미스터 초이?
마지막으로, 독특하고 위엄 있는 이름, 나의 모든 걸 대변할 수 있는 이름, 나의 이름은, 흠흠, 아드리안 고.
이왕이면 혀에 버터 좀 바르고 에이드리언 고라고 불러주렴. 영국 아이로 착각할 수 있도록 말이야.
두려웠대.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내가 호수 한가운데 던져진 돌멩이와 다름없었대. 일상에 이는 파문을 여태껏 잠재우지 못하고 있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도 했대. 애초에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고 수없이 후회하기도……. 어떤 이름이 근사할까, 내 이미지와 딱 떨어질까, 고심하지 않았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평생 싫어하지 않게 될까에 대해서만 고민했대.
그래서 나의 정식 이름이 아드리안 고가 된 거야. 자연스레 ‘고 양’과 연결할 수밖에 없는 ‘고’는 패밀리네임일 테고 퍼스트네임에는 어떠한 의미를 담은 걸까. 책장에서 힌트를 찾으라고 하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책은 수 타운센드 소설 『비밀일기』.
미스터 초이가 십 대에 만난 아드리안은 엉뚱한 매력이 넘치는 영국 소년이야. 스스로 지성인이라 칭하면서 또래를 얕잡아보기도 하고 방송국에 시를 써 보내면서 자존감 드높이기에 몰두해. 거절 메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긍정의 신호를 찾고야 말지.
엄마의 남자친구는 물론 아빠의 여자친구와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들이기도 해. 부모의 한참 늦은 사춘기적 돌발행동을 눈감아주느라, 새로 생긴 여드름을 하나 더 짜내느라 골치 아플 지경이야. 그런 와중에도 자기만의 ‘상상 속 청중’에게 손을 흔들며 견고한 ‘개인적 우화’를 완성해 가지. 그 안을 들락날락하며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여러 감정을 배우는 질풍노도의 아이, 꽤 매력적이지 않니?
가장 사랑하는 문학 속 캐릭터의 이름으로 부르다 보면 나를 평생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적당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마주하는 캐릭터에서 성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듯이 내 몸에서도 그와 흡사한 냄새가 날 것 같아서. 그 냄새가 자기 삶에 밸 듯싶어서. 그래서 나의 이름은,
아드리안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