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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r 30. 2024

진짜와 가짜 사이

남편의 속마음을 낱낱이 뜯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짐을 직접 한국으로 가져왔다. 걔도 지 물건 없으면 불편할 거 아니야.

연초에는 시아버지에게 문득 나를 걱정하듯 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고 했다. 연주 걔 곧 퇴사한 지 벌써 1년 다 돼가는데, 백수 생활 1년 넘으면 취업 더 어려울 텐데.


하지만 정작 내게 연락은 없다. 자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를 열심히 비방한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일까. 남편의 실체는 대체 어디 있을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과 이혼하는 것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 적과 끝없이 싸우는 기분이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 고통은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드는 형벌을 받은 것처럼 영원하게만 느껴진다.


남편이 지금 이 상황에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저의는 도대체 뭘까. 자기가 한 짓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내가 받은 상처를 가늠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남 생각해 주듯 나를 향해 저런 말은 왜 하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남편의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걸까. 남편이 어느 정도 치료를 받아서 인지왜곡이 사라지거나 병식이 생겨야 대화라도 될 텐데. 그래야 이혼 얘기도 시작할 텐데. 사과나 피해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이혼 협의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지옥은 그저 가혹하기만 하다.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같은 내 새끼 가장 최신화인 185화를 보는데 금쪽이 엄마가 내 남편이랑 몹시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표정 변화가 적은 무표정한 얼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의 의미는 보지 못한 채 자기 시선으로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부분, 늙은 부모에게 육아를 맡기고 책임 회피하며 남탓하는 모습까지. 아이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질투를 느끼기까지. 그녀의 남편은 역으로 카산드라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가스라이팅에 주눅 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아이를 직접 키우지는 않지만 자기 물건에 대해 집착하는 것 같은 태도. 학원도 또래 친구도 없는 시골에 아이를 방치해 둔 채 학원 안 다니고 공부 안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잔소리하는 장면은 오히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놓고 스튜디오에서 지적받자 자신의 노모가 아이의 교육을 방임하고 있다고 남탓하기까지. 끝없는 핑계와 남 탓. 문제가 뭔지 자기 객관화도 안 되면서 오은영 박사의 말을 노트에 받아 적는 장면이나 권위자인 사람의 눈치만 살피는 부분에서 기함할 것 같았다. 게다가 방송 마지막쯤 나온 부부의 역지사지 심리상황 연극 치료 장면에서는 내가 다 PTSD가 올 것 같았다. 고작 60분짜리 방송 한 편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많이 씁쓸했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진 걸까 아니면 경험을 통해 통찰력이 생긴 걸까. 아마 둘 다일지도.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하나 잘 이해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각자 품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다. 내가 뭐라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길 바라는 건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금 여러 문제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각자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마음에 근육이 붙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전 21화 남편은 애초에 날 언제든지 버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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