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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Mar 31. 2024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인생 살기

바늘에 찔렸다고 ”바늘과 나는 왜 만났을까“ 그럴 필요 없잖아.



사건이 터진 후에 인스타그램을 아예 없앴다. 가뜩이나 결혼식 직후라서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때였다. SNS를 안 하니깐 좋은 점이 있다. 어떤 현상 너머의 맥락을 짚어낼 줄 아는 힘이 생겼다. 쉽게 말해서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유튜브는 요즘 온통 강아지에 관한 것들이다. 강아지를 입양한 뒤에 관련 영상을 좀 봤다고 유튜브만 보면 한국 반려견 문화가 마치 선진국처럼 굉장히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을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은 후져도 한참 후지다. 유튜브만 보다 보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기 쉽다. 그래서 개인의 세계가 좁아지고 알고리즘에 갇히고 만다.  




그렇게 좁게만 보면 내게 닥친 이 시련도 주야장천 불행한 시궁창일 뿐이고, 나는 가련한 비운의 자기 연민 여우주연상 후보일 수밖에 없다. 예전에 책에서 본 어떤 구절이 다시금 떠올랐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
'왜 내가 바늘에 찔려야 했나', '바늘과 나는 왜 만났을까', '바늘은 왜 하필 거기 있었을까', '난 아픈데 바늘은 그대로네', 이런 걸 계속해서 생각하다 보면 예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망가지기 쉽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충분히 사기 결혼같이 보인다. 특히 남편의 눈물을 기억하는 내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결혼식 직후 남편의 '동태눈깔' 이전에 우리는 연애하는 동안 정말 사랑했다. 남편이 비록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는 괴물일지라도 잠시나마 나를 통해 사랑을 느꼈고 흉내라도 냈다면 그걸로 됐다.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남자는 결혼을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멋대로 왜곡해서 결사반대로 받아들이고는 좌절하고 분노했다. 자기는 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 없다며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그렇다고 나한테 이별을 선언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너무 힘들다고 오열을 했다. 나는 우는 남편이 불쌍해서 따라 울었다.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역 상가 주차장에서 나라 잃은 사람들처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하지만 이제야 돌이켜 보니 남편은 자신의 기준을 정확히 세우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사실 시아버지는 우리 결혼을 강경하게 반대한 적이 없다. 남편은 지레 겁먹고 왜곡된 시각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자간의 오랫동안 얽힌 사슬은 풀지 못한 채 남편이 사는 내내 느꼈을 좌절과 무력, 공포와 맞물려 커다란 인지 왜곡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덩치만 컸지 생각보다 유리멘탈인 이 남자랑 살려면 내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남편도 내 옆에 있으면 자존감이 올라가고 뿌리가 단단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의지와 도움이 아니라 남편 자기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지옥에 빠져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한 발자국 나와서 내가 나를 멀리서 바라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내 불행에 집중해서 허우적거릴 때는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힘을 빼고 잠시 부유하다 보면 머지않아 이 바람의 방향도 완전히 변할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건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나를 밀어줄 수 있는 곳으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내게 글을 쓰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정신과 의사 친구가 ‘Theory of Mind’에 대해 알려줬다. 마음이론에 관한 여러 정보를 검색하고 책을 찾아봤다. 분명 남편의 마음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지만 남편도 아마 일그러진 마음 어딘가에선 나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무의미한 착각 때문에 남편을 기다리거나 재결합을 꿈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남편 덕분에 타인을 조금 더 이해하는 마음을 얻었다. 사람의 행동 이면의 어떤 것들을 더 잘 보게 되었다. 이제 나는 다 큰 어른들 마음속에 조심히 숨어있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이 보인다.  


우리의 사랑이 어쩌다 이렇게 어그러졌나 자주 생각한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이건 그저 작은 불행이 아니라 더 큰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이 꼬인 인연의 끝을 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어떤 실타래가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그저 앞으로 삶이 내게 더 보여줄 이야기만 좇는 중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결국 나는 언제나 이 위대한 이야기의 주체적 화자이자 작가일 것이다. 그러니 나를 더 관조적으로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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