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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08. 2024

착하면 안 되는 이유

나는 나를 지켜야 하니깐

20대에는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엄청나게 어른이라고 여겼다. 그때는 회사 꼴랑 2년 다녀놓고 이젠 익숙해졌다고 일을 좀 아는 줄 착각했다. 근데 막상 30대가 되어보니 그때의 내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다.


오히려 내가 20대였던 시절에는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했던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다들 잘하고 있다. 그렇게 다들 제 몫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정작 그들은 그걸 모른다는 점. 쉬이 불안해하고 비교하려 든다. 그러니깐 자꾸 내부에서 시니어의 부재, 체계 부족, 명확한 가이드 없음 이런 피드백이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회사는 시니어급으로 나를 채용했고, 내 입장에서는 동아줄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회사가 내게 바라는 점은 그저 시니어의 역할인데 도대체 시니어의 역할이란 뭘까? 예전 회사에서 내가 좋아했던 선배를 떠올려봤다. 아직도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커리어 롤모델로 생각하는 선배. 친구들을 많이 못 부른 스몰 웨딩이었는데도 그 선배만큼은 꼭 내 결혼식에 와줘서 자리를 빛내줬으면 좋겠을 정도였다.


조직도 다르고 분야도 달라서 나와 업무적으로 겹치는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분의 사내 평판은 호랑이 같아서 조직 내에서 밑에 팀원들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 선배는 항상 흐트러짐이 없었고, 해야 할 말은 꼭 했다. 억지로 예쁘게 말하지도 않았고, 꾸밈없이 담백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깔끔하고 멋있었다. 그분이 그랬다. “회사는 일만 잘하면 돼. 회사에서 착한 건 쓸데없어”


그렇다. 회사에 착한 사람은 필요 없다. 어차피 회사 동료는 내 친구도 가족도 아니다. 각자 적당히 나이스한 태도로 협업하고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사이.




나는 가끔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불편해도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하고 참았다. 물론 지금도 내 삶의 가치관은 유연함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과 내가 싫은 소리를 못하고 참는 건 다르다는 걸 최근에서야 배우고 있다.


예전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티타임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로 처음 본 사이였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출근길 힘들진 않으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가 어디 사는데, 출퇴근이 힘들어서 자취를 하고 싶다며 내게 혹시 자취하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말했더니 어느 동네 사는지, 월세냐 전세냐, 결국 “집이 좀 사시나 봐요?”라고까지 선을 넘어버렸다.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이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는 무례한 사람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건 선 넘는 질문이라고 확실히 짚어주지 못했다. 그저 좋은 동료라는 이미지로 남고 싶다는 생각에, 어색하게 웃어넘기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착한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세상은 착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어도 상처에 무딘 강철 심장을 갖고 있진 않다. 지난 반년 간 이 점에서 헤맸다. 남편을 사랑하고 연민을 느끼고 이해해 줬지만 내가 받은 건 배신이고 상처였다. 그러면 나는 사람을 미워하고 믿지 않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 계속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정답은 매우 간단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애쓰지 말자. 나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착각하지 말자.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그러니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착한 사람 타이틀을 부여하지 말자. 더 이상 나를 상처 주는 사람들과 상황에 나를 방치하지 말자.




할 말 하고 틀린 건 뜯어고쳐야 하는 시니어 레벨. 그래서 회사도 나를 뽑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연습이다. 그래서 출근이 너무 즐겁다. 단순히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 몰입할 수 있는 기회이기만 한 게 아니라서. 나를 궁핍하게 옥죄던 정신적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고정 수입이기만 한 게 아니라서. 내가 옛날부터 스스로 업어온 어깨 위 부담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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