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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5. 2024

나는 내가 낫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버티며 발버둥 치는 것뿐이었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에 먹고 있던 우울증 약을 증량했다. 물론 선생님은 일시적인 증량일 뿐이니 다시 지켜보고 괜찮아지면 원래대로 줄일 거라고 하셨다. 우울증 약은 우울증을 낫게 해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맞는 약을 찾을 때까지 약의 종류를 계속 바꿔가는 과정이나 필요에 따라 약의 양을 늘려가고 줄여가는 것에 일희일비해선 안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컨트롤되지 않는다.


작년 여름, 한국에 온 뒤에 처음 찾아갔던 병원 선생님은 상담을 차분하게 잘해주셨다. 그 선생님은 실제로 내 남편을 두 번 만났었고, 뒤이어 내 사연을 듣자마자 바로 남편의 증상을 짚어내셨다. 하지만 그때 나는 맨 정신으로 한국에 있을 수 없었다. 머물 곳도 없어서 한 달짜리 단기 오피스텔에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게 힘들어 자꾸 밖으로 도망쳤다. 당연히 그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 현실도피가 끝나고 잠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띄엄띄엄 병원에 가기는 했지만, 내가 괜찮아지고 있는지 어떤지 전혀 몰랐다. 행동만 보면 나름 씩씩하게 잘 버텨내고 있었다.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갔고, 절에도 들어갔고,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게 자질이 훌륭하다고, 뿌리가 단단해서 금방 극복해 내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항상 공허했고, 갑자기 눈물이 한 번 터지면 멈추지 않아서 힘들었다. 공황장애 약은 초반에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우울증 약은 바뀐 적이 없다. 항상 같은 약을 처방받았다.




두 번째 병원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딱히 없었다. 사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해외에서 미리 병원을 알아볼 때 괜찮아 보이는 동네 정신과를 두 군데 찾았다. 한 군데는 초진이 한 달 뒤에 가능했고, 다른 한 군데는 5개월 뒤에나 가능했다. 우선 두 곳 모두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 먼저 예약이 잡혔던 병원에 갔고 그게 첫 번째 병원이다. 시간은 정지된 것 같지만 막상 허무할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려서 어느새 5개월이 지났다. 까먹고 있었던 두 번째 병원에서 예약 확인 문자가 왔다.


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의사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런 상황에 예약 취소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금 다니는 병원에 불만은 없다고. 선생님이 상담도 되게 잘해주신다고. 친구는 어차피 힘들게 잡은 예약인데 굳이 왜 취소하냐고 거기도 가보라고 했다. 다른 병원에 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알리기만 하면 되고, 같은 약을 처방하면 어차피 기록에 뜬다고, 지금 먹는 약을 한 번 챙겨가보라고. 그래서 두 번째 병원 예약일에 약속 시간 맞춰서 갔다. 어차피 그때 나의 일과라고는 정신과 방문과 상담선생님을 만나는 것 말고 외출할 일이 전혀 없었다. 아직 친한 친구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을 때라서 늘 혼자였다.




두 번째 선생님도 첫 번째 선생님처럼 상담을 잘해주셨다. 두 분의 차이라곤 성별 밖에 없을 정도로 모두 훌륭하고 좋은 선생님들이었다. 아, 두 번째 선생님은 내가 기존에 먹던 약에 대해서 꼼꼼히 물어보셨고 새로운 약을 줘볼 테니 한 주만 테스트해 보자고 했다. 어떤 병원에 가든 그건 상관없다고, 중요한 건 내가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지는 것이라고. 두 곳 다 다녀도 괜찮다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새로 테스트한 약을 먹자 2-3일 만에 눈물이 멈췄고 갑자기 현실직시가 되기 시작했다. 5개월 동안 이혼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계속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어 했는데 새로운 약을 먹자마자 와 내가 미쳤지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아프고 충격받아서 정신줄을 놓아버렸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슬픔에 겨워 현실을 회피했었다는 인지가 생겼다. 그리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 인지의 영역을 넓혀갔다. 약이 잘 맞아서 그런지 자연스레 두 번째 병원으로 옮겼다. 누가 더 나아서라기보단 내가 원래 같은 여자를 더 편하게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약 종류를 세 번 정도 바꿨다. 눈물은 병원을 옮기자마자 진작에 잡혔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져서 숫자를 제대로 못 읽거나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인지 개선에 도움 되는 약으로 바꾸고 지금까지 쭉 그걸 먹고 있다. 사실 우울증 약이 비타민B, C를 때려 붓는 것처럼 먹는다고 효과가 바로 체감되지 않는다.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우울증이 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상 생활을 하는데 조금 도움을 준다 차원으로 이해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많이 좋아졌다고, 회복 탄력성이 좋아서인지 빨리 낫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지원하지도 않은 회사에서 먼저 나를 찾아주고 새해부터 출근을 하게 되자, 정말 2024년부터 대운이 바뀐다니 교운기라서 그렇게 힘들었나? 엉터리 생각까지 하며 잠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완벽한 착각이었다. 새해부터 출근을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누가 눈치 줘서 하는 야근도 아니었고 당장 며칠 야근한다고 뚝딱 해낼 수 있는 단기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워커홀릭이었던 적이 없고 그런 체질도 아니다. 그래서 금방 눈치챘다. 아 내가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었구나. 지금 일로 도피하면서 스스로 혹사시키고 있구나. 하지만 일을 어떻게 멈출 줄 몰랐다. 멈춰야 되는 이유도 없긴 했다. 집 같지도 않은 집에 일찍 와봤자 깜깜한 적막만이 방안 가득했다.


그렇게 한 달을 달리며 매일 10시, 11시에 퇴근을 하니 면역력이 박살 나는 건 당연했다. 손바닥 가득 한포진이 나고 입가에 수포가 올라왔다. 한 번은 또 코피가 터지질 않나, 밥을 조금 먹어도 소화불량에 시달려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체기가 심할 때는 이틀에 한 번씩 토를 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머리 쓰는 일만 하니깐 몸이 내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욕하는 것 같았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몸이 아프면 당연히 정신적으로도 타격을 받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악순환이 시작됐다. 며칠 전 글에 썼듯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그랬다.




병원에 가서 말했다. 설마 제가 정말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진 않겠지만 자꾸 이런 기분이 올라와서 무서워요. 다행인 건 제가 그동안 불교대학도 다녔고 병원도 상담도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제 마음을 바로 인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상태가 더 악화된 것 같아서 괴로워요. 괜찮아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닌가 봐요. 이제 겨울 지나고 곧 봄이 오는 게 너무 힘들어요. 결혼기념일이 올 걸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고 더 억울해요. 처음에는 남편이 안타깝고 불쌍하고 또 그립고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로 복수해버리고 싶어요. 저 정말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사랑해서 결혼한 게 잘못도 아니고, 시어머니 심부름한 게 잘못도 아니잖아요.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는 증거 아니에요?




연주 씨, 연주 씨는 그동안 낫고 있는 게 아니라 잘 버틴 거예요. 지금도 정말 애쓰면서 버티고 있는 거예요. 낫는 거는요, 연주 씨가 이혼을 하든 사과를 받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사건이 종결되어야 그때부터 정말 시작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해결이 돼야 거기서부터 낫는 과정의 시작이에요. 요즘 우울감이 더 심해지고 자살에 대한 생각도 든다고 하셨죠? 전혀 이상한 생각 아니에요. 그동안 연주 씨는 열심히 연주 씨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했지만, 그 감정을 다 품어준 것 같진 않아요. 11월에 저랑 처음 만났을 때도 연주 씨는 계속 남편에 대해서, 남편의 병을 이해하고 공부하면서 인지적으로 이성적으로 대하려고 했던 것 같거든요.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도움이 많이 됐죠.


지금 계속 눈물이 나고 자살 생각이 든다는 것도 당연히 한 번은 느껴야 하는 감정들이에요. 크게 상처받았잖아요. 그 감정을 오롯이 다 느껴야 해요. 저는 연주 씨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거라고 절대 걱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제야 이런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아서 좋게 보이는 걸요. 만약 정말로 안 좋은 상황이 온다면 그건 저한테도 아주 긴급 상황이에요. 연주 씨는 회복탄력성이 있어서 그런 이상행동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더 울어도 돼요. 남편을 욕하고 저주해도 돼요. 그러라는 건 아니지만, 저였다면 대자보도 써붙이고 인터넷에 글도 쓰고 맞소송 걸었을 거예요. 감정을 느꼈으면 그걸 표현해야죠. 자기감정을 잘 느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표현해야 정신이 건강한 거예요. 감정을 너무 어른스럽게 대하려고 하지 마세요. 눈물이 나면 참지 말고 실컷 울어도 돼요. 근데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울면 사람들이 당황할 수 있으니깐 약을 조금만 늘려볼게요.




그래서 나는 또다시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 울어도 울어도 슬픔은 끝이 없다. 눈물이 말라서 이젠 정말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만이었다.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을 글로 풀어내고 있는 지금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정도로 내 사랑이 컸었나. 당연히 남편을 사랑하니깐 결혼했겠지만, 내가 그 남자를 이만큼이나 사랑했다니 스스로 어이가 없다. 내 사랑의 결과가 하찮아서 부끄럽다. 내 눈물이 아까워서 또 슬프다. 이 슬픔도 끝나는 날이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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