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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6. 2024

트루먼쇼 같은 인생

나만 빼고 세상 모두가 연기 중인 것 같아


어제 꽤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작년부터 내게 종종 연락을 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잘하다가도 갑자기 대뜸 “거기서 잘 지내지? 오빠랑 재밌게 지내고 있지?” 항상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안부인사가 너무 무서워서 답장을 안 하거나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그 친구가 다 알면서 떠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친구와 나 사이에는 남편과 겹치는 인맥이 있었다. 남편은 뭐라고 말했는지 몰라도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녔다. 그건 확실했다.


왜냐면 내 가까운 친구들 중 한 다리 건너면 남편이랑 연결되는 애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 이상한 반응을 했다. 내가 괜히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생일 축하한다 인사 건넬 때조차도 어딘가 어색하고 티가 났다. 평소에 연락 자주 하던 친구가 나보다 먼저 잠수 타고 사라지기도 했다. 물론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하더라도 당연히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거라 예상하고, 충분한 시간을 주는 걸 수도 있다. 내 친구들은 분명 그럴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니깐. 하지만 다들 내가 어떤 낌새를 보이기 전부터 이미 남편 입에서 흘러나간 이야기 중 뭐라도 주워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래서 아 뭔가 들었겠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또 일이 터지고 얼마 안 지났던 지난여름, 우리가 연애할 때 같이 자주 어울렸던 남편 친구들이 내게 갑자기 따로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냐며 안부를 물었다. 남편은 대체 뭐라고 떠들고 다녔을까. 아마 신나게 자기 이혼 소식을 대단한 사건이라도 되는 듯 말했을 것이다. 자기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의미 부여를 하면서 날 팔아 자신의 당위성이나 자존감을 챙겼을 것이다. 혹은 쓸데없이 혼인신고를 괜히 해서 이혼 과정만 너무 복잡하고, 내가 도장을 빨리 안 찍어주고 본인을 괴롭힌다며 적개심에 가득 찬 채로 불만을 토로했겠지. 근데 알 게 뭐람. 그딴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다시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어제 그 친구가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줬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친구였다. 모바일 청첩장 속 그녀는 요정처럼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나와 같은 업체의 같은 디자인이었다. 흔한 포맷이었지만 그래도 많고 많은 모바일 청첩장 중에 우연하 내 거랑 똑같아서 잠시 마음이 욱신거렸다. 친구는 내게 한 마디를 덧붙었다.


“너가 alone time이 필요한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연락을 못했는데, 편하게 알려줘! 언제든 수다 떨 사람이 필요하거나 고민 나눌 일 있으면 연락해 연주야“


어라, 불과 보름 전 내 생일에는 분명 “니가 한국이었으면 우리 같이 생일파티 했을 텐데. 그래도 거기서 오빠랑 같이 행복한 생일 보냈지?ㅎㅎ“ 라고 축하해 줬으면서. 그녀는 갑자기 내가 한국에 있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그녀의 진심이 뭔지, 뭘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비록 결혼에 트라우마가 생겨버렸을지언정, 앞으로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다시는 죽어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졌을지언정 그녀의 결혼은 격하게 축복받아야 마땅하다. 여전히 사랑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나만 사랑에 상처받고 배신당했을 뿐이지, 사랑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 사랑이 실패했다고 사랑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의 상처받은 이 사랑을 주변에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들에게 계속 잠수를 타면서 좋은 인연을 스스로 끊어내는 게 억울하다. 잘못은 남편이 했는데 왜 내가 숨었을까.


사실 어쩌면 세상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다 같이 모르는 척 연기해 주며 나를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숨을 이유는 더 없는데.


In case I don't see ya! Good morning, good after noon,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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