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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7. 2024

별거 중인 이혼 예정 남편에게 너무 고마운 점들

행복은 다 내 마음에 달려있다. 세 번 복창하고 자기.

나를 워커홀릭으로 만들어줬다. 옛날의 나였으면 어림도 없다. 매일 밤 11시, 12시까지 퇴근도 안 하고 일만 하는데 화가 나지 않는다. 자발적인 일 중독이라서 화낼 대상이 없다. 물론 몸은 아주 개박살 났지만. 현재 시각 밤 11시 40분, 나는 아직도 사무실에 있고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밖에 없다. 내 커리어 패스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앞으로 또 있을까.


연애 시절 내게 수영을 가르쳐줬다. 이제 물이 무섭지 않다. 어느 날 바다를 보러 갔다가 밤바다가 나를 조용히 삼켜버리더라도 살고 싶다는 무의식으로 발버둥 치며 살아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선물해 줬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을 넓혀줬으니 이 또한 잘 쓰면 나의 무기인 셈이다.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들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남편이 강아지를 키우는 덕분에 내게 반려견에게서 느낄 수 있는 모든 행복과 사랑을 경험시켜 줬다.


동시에 펫로스까지 느끼게 해 줬다. 우리 아이는 남편이 대학생 때부터 키우던 아이라서, 내가 아무리 더 사랑하고 애착 관계가 형성됐어도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


그래서 유기견 입양에 대한 생각을 실현하게 해 줬다. 조만간 불쌍한 한 생명을 거둬 평생 함께할 계획이다.


나를 비혼주의로 만들어줬다. 진정한 비혼은 결혼으로 완성된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결혼은 아무리 생각해도 긁는 복권과도 같다. 만약 미혼 시절에 이혼할까 봐 무서워서 결혼을 못하겠다고 말하면 마치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찌질한 패배주의자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나는 결혼 시작과 동시에 실패했으니, 이제 더 이상 인생을 또 걸고 무모한 도전을 할 필요가 없다.


날 닮은 아이를 낳아서 사랑 듬뿍 주고 싶다는 평범한 꿈을 빼앗아갔다. 대신 그 사랑을 지역 사회에 나눔과 봉사로 치환할 수 있게끔 만들어줬다. 기부하는 단체와 금액을 늘렸고, 봉사를 다닌다.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줬다. 사회에서 단절되고 친구들의 연락을 끊으며 고립되어 보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무척 소중하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나는 책을 예전보다 더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불교 공부를 시작해서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법을 수행하도록 만들어줬다. 결국 이 과정에서 나만 더 성숙하고 속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게 모두 다 남편 덕이다.


작가의 꿈을 갖게 해 줬다. 조앤롤링이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혼 후 지독한 우울증과 가난으로 자살 충동까지 겪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해리포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두 달 넘게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이혼 과정이 뭔가 진행되고 있는 게 없어서, 내 글 역시 지지부진하고 고루하며 그저 우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글을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지. 나도 조앤롤링이 될 수 있겠지!




써놓고 보니 남편에게 고마운 게 많네. 나는 얻은 것만 있고 남편은 잃은 것만 있다. 남편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잃었고, 지혜로운 장인어른과 정이 많은 장모님의 신임을 잃었다. 아니 그는 사랑 자체를 느끼지 못하니 어차피 받을 자격도 없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줄줄 모르면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러니 오늘은 반드시 내가 쓴 글을 삼독하고 자야겠다. 제발 꿈에 그 사람이 안 나오면 좋겠다.


담당 선생님과 정신과 의사 친구가 내 우울증 치료 기간을 3년 정도로 보시던데 정말 지긋지긋하다. 3년? 숫자를 헤아리자마자 앞이 깜깜해져서 우울감이 거머리처럼 나를 또 늪으로 끈적하게 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오늘도 열심히 일에 몰두하는 수밖에. 자 이제 퇴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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