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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4. 2024

돌고 돌아 다시 캡슐로

커피머신 하나에 담긴 헛된 희망과 좌절



결혼을 준비하며 마련했던 혼수 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바로 아빠가 사주신 커피머신이었다. 다들 가장 만족하는 신혼 가전으로 로봇청소기나 식기세척기를 꼽던데 나는 1번이 커피머신, 2번이 오디오였다. 로봇청소기가 있다고 집이 더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더 게을러져도 되는 것뿐이라서 나한테 청소 도구는 상관없었다. 바닥 청소나 설거지는 내가 좀 더 부지런하면 되지만, 커피와 음악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신혼집에 들일 커피머신을 고를 때가 기억난다. 우리는 신혼집 고르듯 커피머신을 엄청 신중하게 골랐다. 나는 커피를 많이 좋아하지만 기계치라서 어떤 커피머신이 좋은지 몰랐다. 내가 결혼 전에 자취할 때는 캡슐 커피머신을 썼고, 양가 부모님 댁에도 캡슐 커피머신이 있었다. 처음엔 전자동 커피머신의 끝판왕이라는 유라를 사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다들 유라가 제일 좋다고 하니 무지성으로 결제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기계에 빠삭하고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남편은 전자동 커피머신과 반자동 커피머신을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내게 브레빌이라는 브랜드의 반자동 커피머신을 사자고 제안했다. 브레빌?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코로나 때 홈카페 열풍이 확 불면서 알게 된 브랜드였다.




우리는 브레빌 매장에 두 번이나 가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커피 시음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마음속으로 유라를 고려했다. “유라가 더 편해 보이는데? 자판기처럼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나온대. 그리고 유라가 더 콤팩트해서 귀엽고 예쁜 것 같아.” 처음부터 끝까지 실용적인 남편은 분명 내 말이 어이없었겠지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남편은 전자동 머신과 반자동 머신의 장단점, 특이점,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 관리 방법 등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다. 듣다 보니 브레빌이 정답이었다. 유라뿐만 아니라 모든 전자동 커피머신은 내부에 물이 지나가는 관을 빼고는 기계 내부 청소가 불가능했다. 때마다 사설 업체에 맡겨서 기계를 다 뜯고 분해해서 청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브레빌로 결정하고, 이제 그 안에서 모델을 정해야 했는데 남편이 두 가지로 선택지를 좁혀서 내게 가져왔다.


1. 바리스타들도 추천하는 조합의 커피머신 920, 그라인더 따로 구매하기

2. 그라인더 일체형 모델인 980 구매하기


“난 기능만 보니깐 처음부터 제대로 920에 그라인더 따로 들여서 커피를 배워가는 게 좋을 것 같거든. 바리스타처럼 원두마다 분쇄도 조절해 주고 템핑도 연습하고 그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서 920이랑 그라인더를 사고 싶어. 하지만 니가 그렇게까지 해서 커피를 마실 의향이 있을까? 내 생각에 너는 그럴 것 같진 않아. 니가 잘 쓰려면 일단 쉬워야 되고 또 넌 예쁜 것도 신경 쓰니깐 980으로 사도 나는 괜찮아.”


감탄이 절로 나오는 100점짜리 답이었다. 남편은 내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또 나를 배려하기 위해 자기가 사고 싶은 모델을 포기하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나는 맛있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또 커피를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과 달리 나에게는 ‘덕후 기질’이 전혀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커피머신 하나를 사기까지 그렇게 두 달이 걸렸다. 커피를 좋아해서 그만큼 신중하게 골랐고, 또 최선의 선택을 위해 양보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커피머신을 정말 아끼고 좋아했다. 브레빌 980은 실제로 커피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가정용 커피머신의 최고봉이니 커피맛이야 당연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걸 사기까지 우리가 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취향을 고려한 과정이 좋았다. 나는 우리의 결혼생활이 이 커피머신 같을 줄 알았다. 같이 좋아하는 걸 탐구하고 서로의 중간점을 만들어가는 것.




하지만 다시 혼자가 된 뒤에 나는 커피를 즐기지 못했다. 커피맛을 감상하며 우아 떨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커피머신을 놓을 집도 없었다. 하지만 거처가 정해진 뒤에도 계속 커피머신을 들이지 못했다. 남편이 있는 나라에 두고 온 커피머신이 생각났다. 그게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혹시 그걸 다시 쓸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같은 게 있었다. 남편이 치료를 받는다면, 남편이 후회를 한다면, 남편이 내게 진심으로 빈다면, 만약 혹시 우리가 다시 같이 살게 된다면… 이런 끝없는 희망, 아니 욕망에 집착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에서 커피머신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을 계속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괴롭히는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불쌍했던 걸까. 하늘에서 이젠 그만 포기하라는 듯이 내게 떡하니 커피머신이 생겼다. 동생이 갑자기 내게 취업 축하 겸 생일 선물로 커피머신을 사준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커피머신을 고를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두 달까지 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또 브레빌을 살까, 브레빌을 산다면 내가 썼던 980은 너무 비싸니깐 한 단계 낮춰서 876을 살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포기했다.


평일은 하루종일 회사에만 있느라 집에서 커피 마실 시간도 없는데 괜히 반자동 커피머신을 샀다간 원두만 버릴 게 불 보듯 뻔했다. 결국 나는 캡슐 커피머신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까지 다운그레이드된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 동생에게 염치를 무릅쓰고 혹시 캡슐 커피머신 중에 제일 비싼 것도 되냐고 물어봤다. 네스프레소는 어차피 캡슐에 따라 맛이 다른 거라서 브레빌처럼 기계에 따른 커피맛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제일 비싼 모델을 골랐다.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선택이었지만 내겐 그 작은 사치가 필요했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마음에 드는 캡슐을 골라 커피를 뽑았다. 내가 고른 캡슐이 별로였는지 혹은 이미 브레빌에 길들여진 입맛 때문인지는 몰라도 커피맛은 그럭저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내 기분도 캡슐처럼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엄마 아빠 집에 왔다. 엄마 아빠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동안 집에 가질 않았으니 꼬박 반년만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펑펑 울었다. 엄마는 우는 날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기를 구워줬다.


"너 회사 다니느라 힘들어서 그래. 이거 되게 비싼 한우니깐 다 먹어. 맨날 회사에서 바깥 음식 사 먹어서 어떡해. 너 온다고 토종닭도 사 와서 닭볶음탕 해놨으니깐 그것도 먹고 가."


아빠는 이번 설엔 큰집에 가지 않을 예정이니깐 절대 혼자 있지 말고 꼭 집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빠는 큰아빠에게 앞으로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말고 각자 가족끼리 보내자고 했다. 두 아들 다 효자에 유교적이고 우애 깊은 형제인데. 분명 아빠가 형님에게 그런 제안을 한 건 내 상황이 크게 좌우했을 것이다. “아빠 나 때문이지?” 우리는 친척들끼리 자주 모이고 항상 하하 호호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 구식 가족이었다. 아빠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빠는 애써 아닌 척 나를 달래고 있었다. 동생은 갑자기 캡슐커피 맛없지 않냐면서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오더니, 설날에 어디 놀러 가자고 주제를 바꿨다. 나는 요즘 부쩍 바다에 가고 싶지만 연휴에는 어딜 가도 사람만 많을 것 같아서 확 끌리지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바다에 가면 되지. 강릉 갈까? 거기 커피 유명한 집 많잖아."


내 커피머신은 한참이나 다운그레이드 됐지만, 내 인생도 다운그레이드 된 건 아닌가 보다. 오늘 집에 오길 잘한 것 같다. 엄마가 밥에 무슨 마법을 부렸나 아무 이유 없이 하루종일 눈물이 났다. 엄마 아빠 앞에서 질질 짠 걸 내일이 되면 후회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실컷 울어서 후련하다. 내일 출근만 아니라면 오늘은 엄마 옆에서 같이 자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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