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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3. 2024

반년만에 결혼반지를 끼고

아 맞다 이 결혼 나 혼자 했었지 참

오랜만에 요가를 하러 나갔다. 사건이 터지고 도통 요가를 하지 못했다. 요가를 하면 마음에 낀 때를 씻는 기분이 들어서 옛날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가를 했었다. 오죽하면 요가매트를 메고 인도로, 발리로 요가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하다 하다 요가 지도자 과정까지 이수했다. 요가는 다른 운동과 다르게 수련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날 이후로 도무지 요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그동안 요가로 다져온 마음 수련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물라반다까지 숨을 채워 넣는 게 잘 되지 않았다. 목구멍 어딘가에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라 항상 한숨을 쉬는 것 같은 습관이 생겨버렸다. 가슴 어딘가 답답해서 열심히 숨을 뱉어보려 노력해도 계속 입가에서 헐떡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요가를 그만뒀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걸 배꼽 아래까지 채워 넣는 게 돼야 말이지.




오늘은 요가 수련을 같이 하던 도반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날이었다. 결혼하고 오랜만에 한국에 놀러 온 척을 했다. 그래서 일부러 결혼반지를 끼고 나갔다. 어찌 보면 요가 수련도 사회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니깐. 반년 넘게 안 끼던 결혼반지를 찾느라 한참 동안 찾느라 약속 시간에 늦었다. 남편이 결혼식날 내 손에 반지를 껴준 기억이 선명하게 오버랩됐다. 결혼반지를 사면 결혼식 전부터 미리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안다. 어차피 커플링인데 미리 끼고 다니지 못할 이유도 없긴 하지.


반짝이는 새 반지를 볼 때마다 나도 미리 끼고 다닐까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결혼식까지 꾹 참았다. 결혼식날 남편이 내 손에 처음 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반지를 수령하고 결혼식까지 반년 간 꾹 참고 매일 같이 반지 케이스를 열어서 반짝거리는 반지를 구경만 했다. 근데 그 반지를 한 달도 못 껴보고 지금 와서 다시 껴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요가할 때는 손에 뭐 걸리는 게 없어야 매트 위에서 편한데. 초라한 지금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는 네 번째 손가락. 요가하는 내내 매트 위에 짚은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손가락만 보였다.




요가가 끝나고 우리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친구는 내게 별 다른 걸 딱히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회사원이자 요가 수련을 하는 도반이자 요가 강사로 투잡을 뛰는 갓생러라서 ①다른 사람들만큼 남에게 관심이 없다. ②게다가 한국에서 바쁘게 살았던 내가 갑자기 남편 따라 외국에 갔으니 당연히 힘들겠구나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나 거기 적응 못해서 한국에 돌아와. 어떤 회사에서 이직 제안 왔어. 이제 나랑 같이 다시 요가 수련하자.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너무 잘됐다고 축하해 줬다. 안 그래도 우리는 외향적인데 외국에서 일도 없고 친구도 없이 맨날 집에만 있는 건 감옥 같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라고 같이 묶어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마음은 좋지 않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가 무척 거슬렸다.




남편에게는 바른 소리를 하는 친구가 과연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 중에 속으로 나를 안타깝게 여겨줄 사람들이 정말 한 명이라도 있을까. 아, 그나저나 내 몸은 역시나 쓰레기였다. 수련 중에 아주 기본적인 동작들도 되지 않았고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쫙 펴는 다누라사나에서 갑자기 명치가 아파 매트 위로 쓰러져버렸다. 가슴 어딘가 썩어버린 것 같다. 뇌를 도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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