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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Feb 02. 2024

두꺼운 가면

가면 속 나는 울고 있습니다.


내 결혼식에 왔던 친한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고, 내가 다녔던 회사의 지주사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겸사겸사. 워낙 센스 있고 똑똑한 오빠라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SNS에서 사라졌다고 호들갑 떨며 연락할 사람은 아니었다. 마침 자기 이직 소식을 전하며 내 소식도 물어보는 건 아주 적당하고 적절했다. 그래서 나도 적당하고 적절하게 답을 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사실 지금 한국이라고 말했다.


"두 달 전에 들어왔어. 거기서 직장 구하는 것도 어렵고 직업 없이 지내려니 우울하더라고. 우울증 걸렸는데 우연히 지금 회사에서 제안받아서 급하게 한국 들어왔어."


오빠는 안 그래도 내가 갑자기 인스타그램에서 사라졌길래 그럴 것 같다며 짐작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성격을 알아서 결혼 전부터 너 거기 가서 취업 빨리 못하면 답답하고 힘들 텐데 어떡하냐고 걱정해 줬던 오빠였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빠의 새 직장과 우리 회사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만나서 밥을 먹기로 했다. 당연히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8할은 내 이야기를 해야 했다. 오빠의 새 직장이래 봤자 내가 다 아는 사람들 이야기고, 오빠네 부부는 늘 그랬듯이 잘 지내고 있었다. 끽해봐야 요즘 오빠의 아들이 부쩍 말을 잘하고 제법 사람 같아져서 아주 애 키우느라 죽겠다, 진짜 피곤하고 오늘도 아침에 애랑 한바탕 하고 나왔다 뭐 그런 이야기.


"아니 너 거기 가서 어떻게 지냈어. 너무 힘들었겠다.“


“어 힘들었어. 아무리 여행 많이 다녔어도 외국 나가서 사는 건 다르네.“


“그러니깐. 너 일도 없이 집에만 있는 거 너무 우울했을 것 같은데."


적당히 편집하고 조미료를 쳤다. 나도 그 나라에서 적응을 못했지만, 남편도 적응을 잘 못해서 우리 둘 다 우울증이라고. 사실 나보다 남편이 더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고. 그래서 나까지 더 안 좋아졌다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 될 것 같아서 이직 기회 생긴 김에 나만 먼저 들어왔지만, 아마도 상반기 안에 남편도 돌아올 것 같다고. 내가 급하게 이직 정해지고 들어오느라 시어머니가 대신 xx동에 집을 구해주셨다고, 시댁 근처라서 어머니가 나 혼자 지낸다고 반찬 챙겨다 주시는데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를 못 간다고. 주신 반찬을 먹지도 못하고 일하면서 회사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그래도 한국에 와서 너무 행복해. 사람은 역시 일을 해야 해” 밝아진 척 말했다.


오빠는 얼른 내 남편이 한국에 들어와서 잘 치료받기를 바란다고 진심으로 걱정해 줬다.


“야 너무 안타깝다. 결혼도 큰 변화인데, 지방 도시로 이사 간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로 이민이라니. 너무 타이밍이 안 좋게 다 겹쳤어. 너네 결혼 전에 한국에서 미리 같이 살 때는 괜찮았잖아. 빨리 니 남편도 한국 들어오고 너네 다시 같이 지내면 좋겠다. 건강이 최고야. 나도 옛날엔 하와이 같은 데 이민 가서 살고 싶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막상 거기 갔으면 심심해서 우울했을 것 같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한국이 제일 마음 편해 그렇지?”


오빠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다. 내가 겪은 일을 차마 다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럴 법한 상황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응원해 줬다.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지만 내가 버티고 있는 이 현실이 아직도 버거운데 그걸 생판 남인 오빠한테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기엔 점심시간이 너무 짧았다. 1시간의 점심시간에 내가 압축하고 편집해서 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갑자기 오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내 친구 김땡땡 알지? 걔 작년에 결혼했잖아. 근데 결혼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동호회 활동하면서 사람들이랑 맨날 어울리고 하더니, 그때도 그걸로 많이 싸웠거든. 결국 지금 별거하나 보던데. 에휴. 그리고 내가 아는 부부 있거든? 그 집도 애 있고, 우리 부부랑 많이 친한데 갑자기 부부 둘 다 작년 여름부터 인스타그램을 아예 안 하는 거야. 그래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더니 해킹당했대. 근데 해킹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


원래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오빠도 아니고, 남에게 관심이 많은 오빠도 아니다. 그건 내가 오빠와 친해서 잘 안다. 어차피 만나서 남의 이야기를 할 사람들은 애초에 내가 재미없어서 안 만난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오빠가 내심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구나. 내게 안 좋은 일 생겼다는 건 어느 정도 다 눈치챘고 짐작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내가 적당히 그럴 법한 소식을 전하니깐 안도감에 오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남의 집 이야기가 나온 거구나. '너는 내가 걱정한 이런 케이스가 아니라 다행이야.' 같은 심리였을까. 얼떨결에 내가 오빠의 걱정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태연하게 관심도 없는 생판 남의 가정사를 들으며 어머 그래? 별일이 다 있다 정말,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점심으로 먹은 햄버거를 토했다.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나 보다. 소화제를 먹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 아까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내가 적당한 가면을 써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너무 걱정이라고 말했다.


“언니, 사회 생활 할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가면은 필요해. 모든 걸 솔직하게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언니. 그게 지금 맞는 말이잖아. 언니 아직 결혼했고, 일하고 싶어서 한국 왔고, 남편이랑 떨어져 살면서 일하는 거잖아. 회사 사람들한테도 거짓말한 거 없고, 그 오빠한테도 거짓말한 거 없어.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해. 언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가면도 적당히 필요해."


나는 지금도 가면을 쓰고 있는데 너무 두꺼워서 숨이 막힌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은데 언제까지 쓰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비밀이 많은 사람 역할을 연기하기엔 나는 조심성도 없고 뻔뻔하지도 못하다. 비밀이 늘어날수록 가면만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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