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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덕담이 생략된 설날

올해는 세배도 세뱃돈도 덕담도 없다.

by 은연주

부모님 댁에 와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저녁약을 먹었는데도 계속 두 시간마다 깼다. 내 방은 바뀐 거 하나 없이 그대로였는데도 잠자리가 바뀐 것처럼 밤새 뒤척였다. 내 방은 마치 호텔같이 깨끗했다. 엄마가 나 온다고 얼마나 때 빼고 광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침대에 바스락거리는 새 이불이 칼각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전기장판이 2단계로 맞춰져 있어서 이불속은 딱 기분 좋게 따뜻했다.


엄마는 자식들이 좋아하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남매는 이불 취향이 다 달랐다. 나는 호텔처럼 바스락거리는 구스 이불을 좋아했고, 동생1은 차렵이불, 동생2는 몸을 눌러주듯 무거운 이불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 방에 새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보고 알 수 없는 기분이 뒤섞였다. 큰딸 시집 잘못 보내서 속이 뒤집어졌을 엄마, 이불 정리를 하며 혹시 울진 않았을까 미안하기도 했다.




지난 추석에는 엄마 아빠를 차마 보기 힘들어서 한국을 떠났었다. 반년만에 부모님 댁에 오니 남편의 흔적이 싹 사라져 있었다. 우리 결혼사진도 어디론가 없어졌고, 남편이 옛날에 인사올 때 들고 왔던 공기청정기도 안 보였다. 동생에게 슬쩍 물어봤다. 내 결혼사진 언제 없앴어? 음 지난 주말 직전에 엄마가 치운 것 같던데. 엄마는 사실 최근까지도 청소할 때마다 액자에 쌓인 먼지를 계속 닦았고,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안타까워했다고 들었다. 엄마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내가 무너져 내린 걸 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서 엄마를 보는 게 너무 미안하고 힘들었다.




설날에 내가 집에 온다고 동생이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 른당을 해줬다. 른당은 동생이 제일 잘하는 요리였다. 코코넛밀크를 넣은 인도네시아식 갈비찜이라서 손이 많이 갈 텐데 동생은 특별한 날이면 항상 른당을 해줬다. 집에 언제 와? 내가 른당 해줄게. 동생은 남편처럼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동생과 남편은 친하게 지냈다.


결혼 전 우리가 괌 여행을 갈 때 동생한테 우리 집에 와서 강아지를 돌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빈집에서 혼자 편하게 게임도 실컷 하고 넷플릭스 보라고, 강아지 돌봐주는 값으로 용돈과 카드를 줬다. 강아지 산책 시켜주고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착한 동생은 른당 안 먹어봤다는 남편 위해 우리가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서 른당까지 해놓고 갔다.




동생이 설날에 내가 온다고 뜨거운 불 앞에서 한참 동안 고생해서 만든 른당인데 옛날 생각이 나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 생각해서 억지로 밥을 다 먹었다. 가족들은 계속 내 앞에 먹을 걸 들이밀었다. 아빠가 농사지은 땅콩 먹어볼래? 과즐 줄까? 천혜향 먹을래? 아이스크림도 사다 놨어.


모처럼 명절이라고 온 가족 다 모였는데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기운이 없어서 약을 먹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내가 자는 줄 알고 엄마가 한참 동안 조용히 내 뺨을 어루만지다 나갔다. 애써 눈을 뜨지 않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눈물이 났다. 누워서 우니깐 눈물이 두 뺨을 타고 귀로 들어갔다. 오늘밤 잠은 글렀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한 밤이었다.




1월 1일에 새해를 축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새해를 축하한다니. 아침에 먹기 싫은 떡국을 억지로 먹고 다시 드러누웠다. 동생이 세배 안 하냐고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직도 이 나이가 되도록 세배하면 세뱃돈을 받았다. 성인이 되고 돈을 벌고 결혼해서 애를 낳아도 세배하면 세뱃돈을 받는 가족이었다. 동생은 세뱃돈이 받고 싶었나 보다. 아빠가 세배는 무슨 세배냐고 올해는 됐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께 세배를 하고 새해 덕담을 듣는 그림을 상상해 보니 끔찍했다. 부모님의 새해 덕담은 늘 일정한 패턴이었다. 매년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해라, 올해는 이왕이면 결혼할 사람 만나서 같이 여행 다니길 바라마, 올해도 뜻한 바 다 이루고 아프지 말거라 등등.


만약 올해 세배를 했다면 엄마 아빠는 내게 어떤 덕담을 해줬을까. 아마 엄마 아빠도 적절한 덕담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눈치 없는 동생이 세뱃돈 받고 싶어서 세배 안 하냐고 물어봤지만 선뜻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내게 필요한 새해 덕담은 딱 하나.

엄마 아빠 생각해서라도 잘 이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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