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내 '가족'에는 시부모님도 들어있다.
오지 않길 바랐던 설날이 기어이 오고 말았다. 껄끄러운 연휴의 시작.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커피를 내렸다. 예전에도 써봤던 캡슐커피머신인데 새 커피머신을 들인 뒤에 마음가짐이 사뭇 다르다. 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하루를 살아내라는 어느 노스님의 말씀처럼 그날의 기분을 골라내듯 캡슐을 신중히 골랐다. 일종의 셀프 샤머니즘 세리머니처럼 말이다. 커피를 마시며 어젯밤을 회상했다.
어젯밤 시부모님께서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며 내가 지내는 곳으로 오셨다. 아직 이곳에 '우리 집'이라는 표현을 붙이기 좀 그렇다. 소유권 개념의 '우리 집'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이곳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남편에게 유기당한 이후에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이제 다시 홀로 설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심 마음속에서 거부반응이 올라오는지 여전히 이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잠만 자고 나가는 여인숙 같은 생활을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 마음의 거처였던 남편과 우리 강아지를 떠나서 그런 게 틀림없다.
시아버지는 내가 지내는 곳에 처음 와보셨다. 나는 평소에 간접 조명만 켜놓고 생활하는데, 혹시라도 나이 드신 부모님이 썰렁한 집에 어둡기까지 한 모습을 보시면 마음 불편하실까 봐 일부러 거실이며 주방의 모든 조명을 다 켜놨다.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여전히 일에 진척은 없다. 지금 남편의 말과 행동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다. 자기는 한국과 외국의 변호사를 다 상담받은 끝에 한 변호사를 선임했고, 소송은 3개월이면 끝날 건데 왜 자식 편을 안 들어주냐며 자기 부모에게 으름장 놓듯 말한 남편. 하지만 법원 홈페이지에서 내게 보이는 화면은 1월 7일의 내용이 가장 최신이다. '원고 홍길동에게 참여관용 보정명령 등본 발송'. 남편은 변호사를 말로만 고용했는지 참여관용 보정명령이 원고 대리인에게 가지 않고 본인에게 갔다. 남편은 여전히 내가 시어머니의 심부름을 한 걸로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시부모님과 대화하다가 문득 남편의 원가족 싸움에 내 인생이 볼모로 잡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부모를 협박하기 위해 써먹는 인질일 뿐이다.
시부모님께 엊그제 남편이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 다녀온 뒤에 어때 보였는지 여쭤봤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병원에서 교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몰라도 진료 후에 굉장히 예민하고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고 하셨다. 당연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남편은 자기감정을 털어놓는 개인상담도 무척 힘들어했다. 상담을 다녀온 날이면 항상 방어적으로 예민했었다. 그런 남편에게 자기의 병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과정이 마냥 즐겁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남편이 병식이라도 생기면 좋겠다는 건 나의 헛된 희망이다. 그러면 나한테 사과를 하고 참회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모두 내 집착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99%의 확률로 없다. 그 시간에 집착을 내려놓고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대학병원 진료는 길고 지루할 게 뻔하다. 특히 정신과는 진단도 쉽지 않다. 남편이 그 시간을 견뎌내고 치료받기 위해 협조해 줄까? 아니다. 그는 분명 알 수 없는 거부반응을 이성적으로 남탓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곤 병원에 가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자기가 사는 나라로 도망칠게 뻔하다. 그래도 남편과 3년간 연애하고 결혼 전 1년간 동거했다고, 사건이 터진 후에는 심리학 책을 미친 듯이 팠다고 남편 심리와 행동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우리 아빠랑 비슷한 맥락으로 말씀하셨다. 니 인생은 니 거라고. 많이 힘들고 아프겠지만 더 이상 옛날 생각을 하지 말고 미련, 정 같은 거는 다 갖다 버리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나도 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열심히 애쓰고 있다. 차라리 남편을 뼛속까지 미워하기만 하는 게 훨씬 쉽고 빠르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
남편은 병원에 다녀와서 기분이 나빴는지 갑자기 배낭에 짐을 싸더니 말없이 집을 나갔다고 했다. 본인도 연휴에 집에서 부모님이랑 계속 부딪히는 게 힘들겠지. 어디 갔을지도 대충 가늠된다. 사천이나 통영에 갔겠지. 시어머니는 식탁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조금씩 들썩이는 시어머니의 작은 어깨가 유난히 더 슬퍼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작년여름의 나 같아 보였고 지금의 나 같아 보였다.
몇 달 전에도 이렇게 셋이 어정쩡하게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마침표는 찍히지 않았다. 시간만 흘렀고 변한 건 없다. 모두가 고통스럽다. 나야 어떻게든 이혼을 잘 마무리하고, 그때부터 내 몫의 상처를 치유하면 되지만, 시부모님은 감히 천륜을 끊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슬픔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시부모님의 슬픔은 미래진행형으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가족과 함께 해야 하는 명절에 두 분만 계시는 게 속상했다. 무거운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님, 저 첫 월급 탔어요. 제가 내일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됐다고 괜찮다고, 부모님 걱정하시니깐 일찍 너네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언제 가도 엄마 아빠가 똑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괜찮다고, 그래도 저 아직 며느리라고. 명절 첫날에 며느리가 밥 사드리는 게 뭐 어떻냐고. 점심 먹고 본가로 가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아빠는 내게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밤 10시가 지나서야 시부모님이 떠나셨고 혼자 남은 나는 고요 속에 또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어제 브런치 메인에 내 글이 또 올라갔다. 2만 명이 내 글을 읽고 갔다. 구독자 숫자도 꽤 늘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수 십 명의 동지가 응원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커피를 원샷하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갔다. 그리고 어제는 잊어버린 듯 최대한 즐겁게 식사를 했다. 스님 말처럼 사람은 아침에 태어나서 밤에 죽는 거라고, 잠자는 사이에 어제의 나는 다 죽었다고.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명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간 단골 식당의 파스타는 오늘따라 더 맛있었다. "주방장이 바뀌었나? 더 맛있어졌네" 입맛이 까다로운 시아버지도 칭찬하며 맛있게 드셨다.
"아뇨 아버님, 며느리가 사서 맛있는 거예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아주 친숙한 장면이었다. 연휴 첫날이라서 그런지 다른 테이블도 가족 단위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는 부모님과 딸 사이로 보였겠지. 비록 한시적인 가족의 온기였지만, 그 완벽한 그림 속에 정작 아들이자 남편인 주인공만 없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나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 가족에게 가는 길이다. 이젠 남편이라고 부르기도 싫지만 그래도 추운 밖에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얼른 집에 돌아가서 가족끼리 떡국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 결국 마음의 고향은 부모님 품으로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