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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브런치 메인에 또 올라갔다. 이번엔 '이혼녀' 딱지 체험판이다.

by 은연주

미혼 남녀가 사귀다가 헤어지면 이별이고, 결혼한 부부가 헤어지면 이혼.

근데 왜 이혼녀라는 꼬리표는 그리도 무거운 걸까. 내가 아무리 가볍게 생각한들 사회적 시선이 그렇다. 남녀가 연애하다가 헤어졌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혼했다고 하면 속으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생각한다. 양심에 손을 얹고 나라고 이런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혼한 누군가는 상대방의 외도로, 상대방의 바람으로, 상대방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이혼을 결정한 용감한 피해자일 수도 있다. 또는 더 나은 행복을 찾아 떠난 결단력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용기에 박수를 쳐주거나 위로를 해줘야 하는데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애초에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했대? 남자 보는 눈이 없네. 어차피 결혼은 다 끼리끼리야."


놀랍게도 아직 이혼을 하지 않았고, 고작 이혼 연습 중인 내게도 벌써부터 이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두 달째, 내 글이 메인에 네 번이나 올라갔다. 공감이나 응원, 동정은 바라지도 않지만, 어떻게든 상처 주고 싶어서 안달 난 불행한 사람들도 꽤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니. 그저께 전시현 씨라는 아무개가 당당히 자기 얼굴과 실명을 까고 아래와 같은 악플을 달았다.


이 글을 읽고 진심으로 글쓴이처럼 살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네요. 진정한 사랑을 좀 하시길….. 다시 한번 나는 결혼 정말 잘한 것 같네. 왜 남편을 저격하는지, 본인은 잘못한 게 없는지 ㅉㅉ.. 아 이런 글은 읽지 말아야 했는데...


나는 전시현 씨의 결혼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하나도 안 궁금하다. 다만 저 댓글에서 오히려 전시현 씨의 인생 자체가 제법 불행하다는 걸 유추할 뿐이다. 만약 불행하지 않다면 이 사람의 질 낮은 문해력이 신기할 따름이고.




3X년 전 어느 겨울, 철수와 영희의 장녀 은연주로 태어나 가족 내에서 귀여움을 받았다. 그때의 내 역할은 그저 밥 잘 먹고 재롱부리는 걸로 충분했다. 커가면서 다양한 역할이 추가되고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역할을 맡았다. 학생, 수험생, 대학생, 취준생, 직장인, 여자친구, 며느리... 나는 때마다 내가 맡은 역할들을 준수하게 수행해 왔다. 학생이면 학생 본분에 맞는 행동을 했고, 회사를 다니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K장녀는 물론이고 아직 시부모님께 며느리의 도리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그 많은 역할들 중에 이혼녀 역할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배역이다.


이혼녀 역할은 뭘까? 상처받은 걸 드러내야 하나? 아니면 굳세고 괜찮은 듯 더 씩씩하게 굴어야 하나? 가짜 기혼 인생을 살며 이혼 안 한 척을 해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그저 나일뿐이다. 이혼해도 나는 나. 그래서 이혼 하나로 마치 damaged 스티커가 붙은 것처럼 하자 있는 사람 취급 당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남들 의견 신경 쓰지 마, 그딴 거 하나도 안 중요해." 스스로 수도 없이 용기를 주고 위로를 건네본다. 허나 내가 아무리 남들 신경을 안 써도 밖에서 이혼이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다.


이혼 연습 중인 내 글이 브런치 메인에 또 올라갔다. 메인에 뜬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쏟아내고 사라졌다. 마치 이혼하고 난 후의 차가운 현실을 미리 맛본 기분이었다. 전시현 씨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신상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걸 장황하게 쓰냐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후려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wow!)




이런 실체 없는 악플에 내가 상처받는 게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전혀 타격이 없다. 내가 강철 멘탈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결혼이 실감 나지 않아서 타격이 없다. 웃기지만 그게 이유다. 내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줬다.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남편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돌변했다. 나는 신혼생활을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내가 결혼을 하긴 했었나 잘 모르겠다. 모든 게 꿈같다.


결혼식 당일까지 웨딩드레스 입은 내 모습을 신랑에게 절대 안 보여주려고 친구랑만 드레스 고르러 간 일(그걸 결혼 문화에선 퍼스트룩이라고 한다.), 그놈의 퍼스트룩 때문에 메이크업샵에서도 시간과 동선을 따로 잡고 007 작전을 펼쳤던 일, 해외 이사와 결혼 준비를 동시에 거의 혼자 하느라 고생했던 일, 두 어머니를 모시고 한복 맞추러 갔다가 밥 사드린 일, 아빠랑 시아버지한테 넥타이 선물하겠다고 에르메스 매장 세 군데나 돌았던 일, 엄마랑 이불 고르러 백화점 갔다가 지쳐서 커피 마셨던 일, 그 커피 마시는 내내 엄마가 맏며느리로서 잘해야 된다고 훈계하는 통에 내가 알아서 잘하겠다고 성질냈던 일, 야외 웨딩이라서 결혼식 당일까지 날씨 걱정으로 마음 졸였던 일, 그날 내 친구의 축사를 듣고 정작 내가 아닌 남편이 눈물을 펑펑 흘린 일.


모든 장면이 아주 생생해서 혹시 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닐까 싶다. 혹시 지금 이 상황이 결혼을 앞두고 메리지 블루에 시달리는 은연주의 깊은 꿈이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결혼 전에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기혼의 삶을 건너뛰고 바로 이혼의 삶으로 가는 게 어색하다. 초등학교에서 갑자기 고등학교로 월반한 기분이랄까나. "남자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그러니깐 이혼하지." 그래서 나는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이 먼저 이유불문 이혼을 고집하고 있어서 나도 하는 수 없이 이혼을 결심했지만, 그게 올바른 방향인 건지 아직도 확신이 없고 혼란하다.


만약 남편이 나를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느 때처럼 그의 손을 잡고 달래줬을 것이다. 연애 초창기에 나를 만난 뒤로 자신과 부모님의 사이가 더 편해져서 내게 고맙다고, 나도 너희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던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어떤 칭찬보다 진정성이 느껴져서 감동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런 내 태도가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영혼 하나 희생해서 남편의 가족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준 것 같다. 사랑의 대가가 이리도 허망하다니.


차라리 이혼에도 운전면허증처럼 면허증을 발급해 주면 좋겠다. 세상의 편견에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하면서 살고 싶지 않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결국 이 역할도 또 잘 해낼 것이다.



추신: 또 다른 전시현이 나타나도 난 계속 글 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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