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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도 연습이 필요하다.

비록 결혼은 실패했지만 이혼이라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

by 은연주


어젯밤 그렇게 제발 꿈에 남편이 안 나오길 바랐는데 역시나 꿈에 또 남편이 나왔다. 꿈에 나오지 말라는 나의 간절한 무의식이 오히려 남편을 호출하는 걸 수도 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 봤다. 그래서 차라리 제발 꿈에 나오길 기다린 적도 있다. 그럼 분노에 차서 죽여버리든지 어떻게든 복수할 거야, 악에 받친 이 마음을 달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꿈에 나오라고 간절히 빌어도 봤다.


하지만 남편을 꿈에 나와라 마라 한들 꿈이 그렇게 호락호락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꿈은 내가 꾸는데 정작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없어서 나는 매일 밤 속수무책으로 악몽에 시달렸다. 다정했던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이 꿈에 나오면 그건 그거대로 슬퍼서 악몽이었다. 하지만 그런 추억 회상적인 꿈보다는 대부분 현재의 내 심리 상태인 배신감이 어떤 형태로든 표출되는 악몽이 더 많았다.


어젯밤 꿈에는 남편뿐만 아니라 시동생과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 시댁 식구들이 총출동했다. 꿈에서 나는 지금이랑 같은 상황이었다. 이혼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 시어머니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종종 연락해 주시는 상황. 꿈에서 시어머니는 내게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의무감으로 나를 챙겨주고 계셨다. 시어머니의 진짜 속마음은 나도 모른다. 꿈에서 그런 마음으로 느껴졌다는 건 그 정도의 억울함이 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나는 시어머니를 좋아했다. 성격이나 취향이 나를 낳아준 엄마보다 더 비슷했다. 내가 등산이나 배낭여행을 좋아하는 건 아빠를 빼다 박은 구석이었다. 당연히 딸이니깐 엄마와도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엄마는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는 집순이였다. 다른 모녀들이 같이 여행 다니는 걸 보면 가끔은 부럽기도 했지만, 나도 엄마 취향대로 집에 얌전히 있는 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그런 꿈은 포기했었다.


남편과 연애 시절, 남편에게 어머니도 자기랑 같은 코스로 트레킹을 다녀왔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만약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면 엄마 대신 시어머니랑 같이 여행 가면 되겠다는 꿈에 부풀었었다. 어쨌든 내가 사랑했던 남자와 관계가 끝나면 그의 가족들과도 관계가 끊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꿈에서 시어머니는 내게 연락을 평소처럼 하셨지만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남편은 소개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의 재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남편과 시동생은 시댁에 방문한 날 보더니 네가 여기 왜 있냐고 화를 내며 마치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지금 이 상황과 꼭 닮았다. 시아버지는 나보고 이제 더 이상 엮이지 말고 너는 너 갈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혼도 안 했는데 무슨 소개팅이냐고 화를 내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갑자기 어디서 등장한 시댁 친척들이 나를 둘러싸고 이 이혼의 원인이 나인 것처럼 몰아갔다. 남편 말을 왜 안 듣고 멋대로 그 심부름을 했냐고 이혼당해도 싸다며 나를 앞에 두고 수군거렸다. 꿈에서나 가능한 핍박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괴로운데 이 마음을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분명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울부짖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유리문 밖에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아침부터 먹은 것도 없는 빈속에 위액을 게워냈다.




어제 남편은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상담인지 검사인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시어머니도 잘 모르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모르시는 건지 내가 알 필요가 없어서 말씀을 아끼시는 건지 나는 모른다. 남편의 치료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치료를 거부하고 다시 자기가 사는 나라로 돌아갈 계획인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법적으로 아직 내 남편인데 남편 마음대로 그렇게 하라고 방치하는 게 맞나? 보통의 이혼이라면 당사자들끼리 성인답게 해결하는 게 맞겠지만 내 남편은 정신이 아프다. 그런 남편의 공격으로 나도 정신이 아프다. 썩어 문드러진 마음에 각종 우울증 약이며 불교 수업이나 상담 같은 인공호흡기를 억지로 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혼도 연습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더 좋은 이혼을 위해 연습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꿈에서 계속 남편이 나를 단련시키고 있는 걸까. 이 세상에 행복한 결혼이라는 말은 있어도 행복한 이혼이라는 말은 없다. 결혼은 실패했어도 이혼은 잘 해내고 싶은데, 기껏 아무리 이혼을 잘 해내봤자 거기엔 행복이 없어서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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