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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세계는 어떤 세상일까

Knock-knock

by 은연주


동거 기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편의 전혀 다른 모습은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튀어나왔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를 보는 것 같았다. 결혼식날 나를 보고 소 같은 눈망울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던 남자는 하루 만에 예민하고 불안해진 사람이 되어 내게 온갖 짜증을 쏟아냈다. 나는 갑자기 브레이크도 없이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연애 시절엔 한 번도 이러지 않았던 남자였다. 남편의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 매사에 논리적이었다. 그의 짜증은 항상 내 탓이었다. 내가 다 잘못한 거라고 멀쩡한 나를 눈치 보게 만들었다.




남편의 주장으로 결혼식 바로 다음 날 해외 포장 이사를 진행했다. 애초에 나는 그 스케줄이 절대 말도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남편의 고집은 완강했다. 이제 이 집의 가장은 나라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길래 그래 오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미 해외 주재원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 나보다 잘 알겠지. 컨테이너로 이삿짐을 보내는 게 보통일이 아니긴 하다만 그래서 우린 해외 이사 전문인 대기업 계열사를 불렀다. 아무 문제 없이 이삿짐 포장이 진행되는 와중에 남편은 갑자기 뭐든지 내 탓을 하며 비난했다.


뭐에 짜증 난 건지 모르겠지만 대뜸 이제 결혼식 끝났다고 본성 드러내는 거냐며 내게 소리쳤다. 서로 싸우고 있던 중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남은 짐 정리를 마저 하고 있었다. 남편은 앞뒤 맥락 없이 급발진해서 씩씩댔다. 아무리 이해심 넓고 고통의 역치가 높은 나로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납득이 가면 나도 개같이 싸웠겠지만 나는 혼자 길길이 날뛰는 남편을 보며 ‘왜 저래? 뭐야 미쳤나?’ 생각했다. 마치 지하철 2호선에서 혼자 화내는 아저씨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사건은 향후에 남편의 입장에서 잘 포장되어 해외 이사를 준비하며 내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는지 이혼 사유로 둔갑해 있었다. 물론 남편 특유의 타당한 논리까지 곁들여져 있어서 남이 보면 내가 정말 ‘샹년’이었을 것이다. 작년 9월, 남편을 따로 만나고 온 아빠가 내게 그랬다. “길동이가 속이 아주 많이 아픈 것 같다. 자기 세계에 갇혀있는 것 같아. 남의 이야기가 아예 안 들리는 눈동자였어. 길동이 논리가 아주 이성적이고 체계적이야. 걔 말만 들으면 네가 진짜 나쁜 사람이야. 그럴듯한 게 아니라 정말 완벽한 이유를 만들었더라.“




나는 이제 확실히 안다. 남편의 정신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예전에는 그가 공감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상처 많은 사람인 줄 알고 안쓰러웠다. 마치 사람에게 버림받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남편 내면에 소심하고 겁에 질린 어린 남자애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남편은 분명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깐 그런 사람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겠지. 결혼을 재촉한 것도 남편이고 엉엉 울면서 먼저 프러포즈한 것도 남편이었으니깐. 우리가 결혼 전에 부부 상담을 갔을 때 선생님은 남편의 개인 세션에서 따로 물었다.


- 은연주 씨는 우리 길동 씨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요. 그런데 연주 마음을 아는 게 어려워요. 연주가 저 때문에 언제 슬픈지, 왜 슬픈 건지 그런 거요. 다른 사람들 마음을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믿기지 않지만 남편은 나를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그의 세계에서 소중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지면 언제 소중했냐는 듯 버려도 되는 그런 걸까. 남편은 타인을 믿지 않는다는 걸 밖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참 다행이었지만, 딩크를 완강히 고집하던 남편은 애가 생기면 친자 확인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반응해야 될지도 몰라 눈만 꿈뻑꿈뻑거리던 내게 남편은 논리적인 양 한마디를 더했다. "깔끔하게 친자 확인해서 친자라고 나오면 그만인데 그게 사람들의 시빗거리인가? 그걸로 쓸데없이 싸우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가. 안 그래?" 사람에게 상처를 얼마큼 받으면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까. 안타까웠지만 내가 그의 부모도 의사도 아니고 상담사도 아니니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어차피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랑은 진짜로 애는 안 낳는 게 낫겠다. 차라리 남편이 아주 확실한 딩크라서 다행이었다.




남편의 세계는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아스퍼거나 자폐 스펙트럼, 편집증 따위에 대해 탐독할수록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불신이 가득해 보인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소중하다고 표현했는데 과연 나는 정작 그의 세계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가 본 적이 있을까. 남편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평생을 마스크 쓰듯 모방했다. 나는 내가 진정한 사랑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면 쓴 남자를 나 혼자 짝사랑했던 거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두고 사기 결혼이라고 말하겠지.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작은 괴물이 꿈틀거리며 분노와 저주를 노래한다. 어제오늘의 내 감정놀음이 아무리 커다란 진폭을 가지고 있어도 언젠가는 잠잠해지겠지. 지금 참으면 나중에 진짜로 미친년이 될까 봐 참지 않고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편이 애잔하고 불쌍하다. 남편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내 세상이 잿빛으로 변해버렸지만, 일생을 잿빛 세상만 살아왔을 그를 생각하면 퍽 안타깝고 딱하다. 내 처절한 절규는 언젠가는 잦아들겠지만 그의 세계는 출구 없는 독방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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