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들의 경험담이 필요한 시점. 그게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좋아하는 시의 구절이다. 학생 때 교과서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시의 의미를 하나도 몰랐다. 친구 잘 사귀어야 한다, 행여나 내가 껄렁껄렁한 애들이랑 어울릴까 봐 엄마는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엄마는 자기 딸이 날라리가 되기엔 착한 찐따라서 자격 미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책만 읽는 애였는데 참 걱정도 팔자였다. 그래서 시를 처음 봤을 때는 엄마 말이 떠올랐다. 엄마 말대로 사람을 잘 사귀라는 뜻이구나 그렇게 이해했다. 어렸으니깐 그게 당연했지.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잃고 아파보니 드디어 이 시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된 것 같다.
남편에게는 평생 나밖에 모를 것 같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남편의 꿈은 40대 중반에 은퇴하고 시골 마당 있는 집에서 나랑 강아지랑 셋이 같이 사는 거였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대뜸 호주 이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자유로를 달리는 차 안이었다. 만약 애가 생긴다면 우리 애는 한국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고, 호주 가서 뛰어놀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곤 계속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연애 내내 굳건하게 딩크를 고집하던 사람이었다.
호주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호주 타령을 한다고? 호주 타령은 내가 먼저 했었다. 나는 세계일주를 하면서 내 성향에 가장 잘 맞는 곳이 호주라는 생각을 했다. 뉴욕이든 런던이든 파리든 세계 어디를 가봐도 살고 싶은 곳이 없었다. 살기는 한국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서울은 싫으니깐 서울 근교의 시골에서 오도이촌 생활을 하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귀농귀어를 꿈꿨다. 우리는 도시 출신 외지인들끼리 귀촌해서 마을을 이루었다는 전남 고흥으로 이사 가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만약 외국에 나간다면 유일하게 살고 싶은 곳이 호주였다. 호주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미국에도 대도시부터 시골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미국보다 조금 더 자연 친화적인 호주가 내 취향이었다. 게다가 신생 이민 국가에다가 압도적인 아시안 인구 비율까지.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처음으로 '이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곳이 바로 호주였다. 아무리 복지가 좋아도 북유럽은 추워서 싫고 나 혼자 검은 머리 이방인인 것도 싫었다. 연애할 때 그런 얘기를 한두 번 한 적이 있다. 막연하게 '난 만약 나중에 외국 나가서 산다면 호주 가서 살고 싶더라.' 정도에 그친 시답잖은 말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남편이 어느 날 문득 자연스럽게 호주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했을 때 오잉? 싶었지만 오히려 내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는구나 했다. 남편은 나를 신뢰하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나와의 미래를 많이 생각하는 줄 알고 감동받았다.
하지만 난 그의 삶 속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배우자로서의 책임감은 그가 키워온 강아지를 돌보는 책임감만도 못하다. 그가 강아지는 진심으로 사랑할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 말을 잘 들어서 예뻐하는 소유욕과 통제욕일 것이다. 강아지를 세상 유일한 자기편이라고 여기겠지. 아마 남편이 그때 호주 이야기를 하면서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가정을 했던 모습은 그저 그가 하던 게임의 확장팩이나 치트키 정도였을 것이다. 한없이 깊은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내게 남겨진 건 그의 꼬리뿐이었다. 그는 도마뱀처럼 자신의 꼬리를 싹둑 자르고 도망갔다. 나는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도망가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남편이 처음 내게 이혼을 요구했을 때 제정신이 아닌 나는 사리분별이 되지 않았다. 마구 애원도 해보고 화도 내봤다. 그 사람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논리로 따져보기도 했다.
“오빠. 난 며느리잖아. 시어머니가 시키신 심부름을 어떻게 거절해. 심부름했다고 나랑 이혼하겠다는 게 말이 돼? 어머니랑 내가 둘이 짜고 오빠를 속였다고? 애초에 심부름을 시킨 건 어머닌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오빠 말대로라면 어머니 안 보고 살겠다는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남편은 서슬 퍼런 눈으로 내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40년을 낳고 키워준 우리 엄마를 내가 왜 안 보고 살아? 그냥 너 하나 버리면 끝나는 일인데."
너무 쉽고 명료한 그의 대답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직도 남편 꿈을 꾼다. 남편은 높은 건물 창밖으로 나를 밀어버리기도 하고, 어두운 골목길 조용히 내 뒤를 밟고 몰래 내 옆구리에 칼을 쑤시고 도망가기도 한다. 나는 분명 PTSD가 아닌 외상 후 성장을 할 거라고 믿지만, 그렇다고 이 끔찍한 악몽들이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신감과 공포감으로 매일 조금씩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강하고 극복 의지가 있음에도 이만큼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이 배신감을 어떻게 버텼을까. 나보다 더 긴 세월을 한 이불 덮고 잔 사람들은, 고슴도치 같은 자식도 낳고 함께 키워온 사람들은 다 어디서 무엇하나. 홀로 남겨진 이들은 이 감정을 어떻게 추스르고 어디서 희망을 찾았을까. 다른 이의 경험담에 기대어 잠시 용기를 빌리고 싶다. 나도 이 시간을 잘 지나가고 싶다. 나를 응원해 주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꼭 긍정적인 보답을 하고 싶다. 누군가의 새로운 희망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배우자의 '배신'이라고 단 두 글자로 축약해서 말하기엔 매우 다양한 사연들이 있다. 눈물도 상처도 가지각색이다. 자살, 외도, 성매매, 가정 폭력, 도박, 몰래 얻은 빚, 알코올 중독. 그 모든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혼자가 된 사람들은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나는 앞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 걸까. 아까운 내 사랑을 엉뚱한 곳에 쏟아부어서 허무한데 이렇게 앉아서 울고만 있어도 되는지 묻고 싶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도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다 못해 날카롭고 뾰족하고 썩어버린 그의 마음은 조용히 내 마음까지 문드러지게 만들었다. 귤 상자 맨 밑바닥에 깔린 귤처럼 내 마음속에 소리 없이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세상에 상처를 극복한다는 말은 없다. 그냥 내 안에 기생해서 같이 사는 거겠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라고. 잘 받아들이고 길들이는 연습을 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