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남자

그가 사과하는 상황은 오직 챗GPT 같았다.

by 은연주

글을 쓰면서 놀란 것은 세상에 생각보다 내 남편 같은 성향의 남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매일 피 토하는 심정으로 하루를 기록한다. 상처가 속에서 곪아 나중에 더 크게 탈 날까 봐 나 살자고 쓰는 글인데 어쩌다 보니 비슷한 남자와 결혼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내 글을 읽게 되었는데 자기와 너무 똑같은 상황에 마치 자기 속마음을 대신 써놓은 것 같다며 나랑 꼭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제발 연락 한 번만 달라던 분들만 내 기억에 대략 6-7명 정도였다.


다들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겠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왔을까. 너무나도 잘 안다. 몇 달 전에는 나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온갖 정신분석학 책을 뒤졌다. 인터넷에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아스퍼거,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 성격장애 별의별 키워드로 검색해 봤다. 하지만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를 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애초에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한 치 앞 내 인생도 모르는 사람이다. 남편복이 지지리도 없어서 결혼생활을 해보기도 전에 신혼이혼을 하게 된 어떤 여자.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8개월째 매일 복용하고 있지만 우울증 완치까지 빠르면 3년은 더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낙담한 초보 환자. 그래서 내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크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민 손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모두 나 같았고, 나 같고, 나 같을 거라서 마음이 쓰라렸다. 대신 내가 해봤던 것들을 추천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셔라, 일기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셔라, 쉬지 않고 계속 걸으셔라. 약해진 멘탈에 몸까지 타격을 입어서 비록 완주는 못했지만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었다. 처음부터 완주하고 싶다는 목표로 간 건 아니었다. 죽으러 간 거였다. 유럽 시골길에서 증발돼도 괜찮겠지. 옥수수밭 한가운데로 사라지면 아무도 찾지 못하고 딱 좋겠다.


교회도 성당도 안 다녀서 신을 믿지 않지만 정말로 신이 있다면 한 번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냐고 하느님 부처님 다 나와보라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겸손한 순례자의 마음이 아니라 악에 받친 환불원정대 같은 심정이었다. 아마 그런 마음가짐으로 떠난 순례길이라서 완주를 하지 못한걸 수도 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남자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내가 정말 아빠만큼 사랑했던 남자를 욕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다만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고민하고 연구하고 과거를 톺아보며 얻은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나가기로 했다. 미리 밝혀두지만 이건 남편 흉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서 영문도 모른 채 한순간에 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나 단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을 죽어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뿐만 아니라 평소 감정 표현 자체에 굉장히 인색했다. 그건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우리 집 남자들은 미안하다 고맙다 이런 말을 못 해. 감정 표현은 절대 못해. 나 살면서 길동이 아버지한테 한 번도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생각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왜 그런 말을 못 할까.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하면 얼굴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걸까 궁금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원체 표현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우리 아빠도 다정하긴 했지만 말이 많은 남자는 아니어서 어느 정도 이해 됐다. 게다가 시아버지도 남편도 감정 표현만 못할 뿐이지 행동이 못되고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물론 남편이 순식간에 내 뒤통수를 치고 나를 유기해 버린 행동과 그 후 일련의 과정들은 사이코 그 자체지만. 내가 지금 힘들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남편이 3년의 연애와 동거 기간 동안에는 겉바속촉 같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인지부조화. 내가 기억하는 추억 속의 그와 지금의 무책임하고 기이한 남자가 전혀 매치되지 않는데서 오는 충격과 그로 인한 공황장애. 내 사랑이 배신당했다는 생각, 가짜에게 내 진짜를 다 퍼줬다는 억울함과 자괴감에서 오는 우울증.


아무튼 남편은 평소 자기의 행동 때문에 내 기분이 상해도 절대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오히려 잠수를 타거나 뻔뻔하게 더 성질을 부렸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뭔가 미안한 눈치긴 한데 도통 표현을 하지 않으니 처음엔 그게 더 화났다. 하지만 MBTI의 유행과 맞물려 여러 심리학 책의 도움으로 내가 남편을 조금 더 감싸주고 포용력 있게 받아줬다. 내가 아는 사랑에는 이기고 지는 게 없었다. 아빠가 내게 써준 편지에도 사랑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자주 하라고 했다. 잘못한 사람은 남편인데 스스로 마음을 달래는 건 정작 나였다.




그런 남편이 유일하게 먼저 사과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틀렸을 때였다. 남편과 통영으로 캠핑을 갔다가 올라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워낙 매주 여행을 가서 장거리 운전을 할 때는 서로 교대로 운전을 했다. 남편이 70% 정도 운전하면 나는 30% 정도를 했다. 통영 대전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내가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다음 휴게소와 다다음 휴게소 위치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봤다.


- 어 가는 길에 함양휴게소 있고 그 다음 휴게소는 산청휴게소 있네.

- 응 그럼 나 산청휴게소로 갈게. 다다음 휴게소 가면 될 것 같아. 오빠도 괜찮아?

- 아 미안 미안. 산청휴게소가 먼저고 함양휴게소가 다음이다. 진짜 미안.


휴게소 명칭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거지?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나 지식이 틀릴 때만 바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것도 대단한 결의라도 느껴지듯 항상 크게 시인했다. 남편은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았다. 나도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많아서 책도 많이 읽고 나무위키를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더했다. 마치 뇌에 위키피디아를 이식한 사람 같았다. 특히 역사, 과학, 기계에 대해 빠삭했다. 나는 그런 남편이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서 정말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틀릴 때만 곧장 사과했다. "미안해." 챗GPT도 자기가 틀렸을 때는 사과를 잘하더라.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너무 웃겨서 한참을 울었다.




부부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이 남편에게 자기감정을 인지하는 방법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이것저것을 알려주셨는지 당시엔 남편도 노력을 했다. 혼자 욱해서 화를 냈다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자 자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건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나는 비싸도 상담이 정말 효과 있네, 진짜 좋다, 앞으로 더 좋아지겠다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끔 상상해 본다. 과연 남편이 내게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드는 날이 올지. 미안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진심으로 사과할 날이 올지. 하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에 목숨을 걸기엔 이미 내가 진 게임 같아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기했다. 그를 포기한 게 아니라 나를 포기했다. 그는 그대로일 것이다. 사람은 안 바뀐다. 나도 안 바뀐다. 그러니 내가 기대하는 나를 포기하는 게 빠른 길. 나는 이런 형편없는 남자를 사랑해서 이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나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연주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는 정말로 이렇게 사과했다. 이럴 때만 미안하다고 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7화택시 아저씨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