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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아저씨를 울렸다.

"아가씨한테 내리는 이 비는 곧 지나가요."

by 은연주

오늘은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퇴근 후에 부리나케 달려가도 언제나 마지막 타임 고정 환자다. 내가 다니는 병원 선생님은 정말 진정성 있게 진료를 봐주신다. "연주 씨 한 주 어떻게 보내셨어요?"


이번 주는 내내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출근 시간이 평소보다 1시간은 더 늦어졌다. 세수도 못한 채 양치만 겨우 하고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이번 주에 쓴 글들은 그동안의 의연함은 온데간데없고 처절해서 못 봐줄 지경이었다. 마치 작년에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 묘사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작년 여름 지리산 계곡물에 발 담근 채로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피눈물이었다. 나는 자식이 없는데도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것만 같았다. 아들을 잃은 건 아니지만 내 세상을 잃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남의 슬픔에 잠시 기대어 눈물을 흘려보냈다. 장마가 끝난 후의 지리산 계곡은 물소리가 우렁찼다. 마음 놓고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종이책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마음껏 떨어트렸지만 나중에는 전자책 스크린이 고장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나는 그때보다 더 지옥 같은 기분을 맛본 것 같았다. 남편이 정말 자기가 이상하다고 인지가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스로 이상하다는 걸 인정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고분고분 치료를 받고 있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분노케 만들었다.




선생님은 내가 분노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분노는 사람을 많이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고 했다. 약 용량을 늘렸다. 10mg로 시작했는데 지난달에 15mg로 증량했고 결국 오늘 20mg로 더 늘어났다. 약 용량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믿고 내 선생님을 믿는다. 하지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약 용량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싫었다. 스스로를 비난하고 싶었다. 남편을 저주하는 내 모습이, 시댁 식구들을 포함한 남편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는 내가 역겨웠다. 살아생전 이렇게 누구를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한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악으로 물들이는 것이라서 이 과정을 외면하고 싶었다. 애써 아니라고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온전한 정신이 아닌 남편이 딱하고 애잔하면서도 죽여버리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갖는 나도 확 같이 죽어버리고 싶다.


늘어난 약 봉투를 챙기고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탔다. 버스를 기다릴 기운도 없었다. 택시 기사님은 방금 전 손님이 내리자마자 내가 바로 탔다고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 아따 학생이 행운의 손님이네~ 고마워서 워째~ 어제오늘 내가 땡잡았나. 아 자꾸 이렇게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네?


- 아 그래요? 기분 좋아 보이셔서 저도 좋네요. 그리고 저 학생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 에 암만 봐도 학생인데? (룸미러로 힐끔 내 얼굴을 봤다.) 아 근디 우리 집사람이 숙녀분한테는 나이 묻는 거 아니라고 엄청 욕 바가지로 뒤집어썼는디. 여자 손님 타시면은 나이 같은 거 절대 물어보지 말라고, 그거 실례라고. 진짜 학생 아녀요? 그럼 회사 댕기나?


- 네 저 나이 3X살이에요. 회사도 X년 다녔어요.


- 웜메 아가씨 나이를 어디루 잡쉈는가. 그러면 인제 결혼은 하셨고?


- 네 했어요.


개미만 하게 대답했다. 버스 기다릴 힘도 없어서 택시를 탄 건데 이상하게 수다쟁이 택시 기사님의 스몰톡이 싫지는 않았다. 기사님은 전형적인 '사람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왠지 드라마 속 성동일 아저씨 캐릭터랑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룸미러에 달린 묵주와 가족사진이 차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작게 흔들렸다.


- 아가씨는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우리 딸랑구가 지난달에 결혼을 했는데 나는 우리 딸내미 결혼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아까워가지구. 나도 택시하고 우리 집사람도 일하지, 그니깐 애를 볼 시간이 어렸을 때부터 많이 없었어가지고 최대한 늦게 하길 바랬지. 좀 더 끼구 살게. 근데 딱 서른 됐다고 훌쩍 시집 가불데? 근데 막상 또 가니깐 아주 속이 후련하고 좋아.


- 왜요? 서운하지 않으세요?


- 나두 그럴 줄 알았지. 아니 이노무 기지배가 나이 서른 처먹고 맨날 술 퍼먹구 댕겼거든. 우리 집에 푸들을 키우는데. 걔 이름이 초코야. 초코가 얼매나 사람 같냐면은, 걔가 집에서 나랑 제일루 안 친하거든요? 걔는 우리 딸 개야. 딸내미가 데리구 왔어. 근데 그 가시나가 술 마시고 들어온 날은 술냄시 풀풀 풍기니깐 초코가 얼마나 그걸 극혐을 하고 짜증이 나는지 그날은 꼭 잘 때 내 옆에 와서 자드라고. 하여튼 다 큰 처녀가 허구한 날 술만 처마시고 돌아다니는 거 아주 질색이었는데 그거 이제 안 봐도 되니깐 너무 좋아. 그리고 또 막상 딸이 시집을 가버리니깐 이제 집에 집사람하고 나하고 딱 둘만 있잖아요? 그게 옛날에 신혼 때처럼 알콩달콩하고 좋네 또?




적당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는지 순간 머리가 정지된 것 같았다. 하하하라고 어색한 웃음이라도 날렸어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결혼 생활도 그런 거였는데. 맞장구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정말 오늘 기분이 좋은지 내가 행운의 손님이라서 신이 난 사람처럼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 아가씨 아직 애 없죠? 이제 애 생겨봐. 그럼 꼼짝없이 그냥 나 죽었다~ 하고 살아야 돼. 우리도 애 키우느라 돈 벌고, 그때는 진짜 힘든 게 힘든 건지도 모르고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지. 근데 이제 다시 신혼이 찾아온 거야. 부부는 친구 같은 게 제일 좋거든요. 결국 자식새끼도 다 지 살길 찾아서 떠나면은 남는 건 두 사람밖에 없잖아. 안 그래요?


네에.. 작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있었다. 울음이 찰랑찰랑 찬 목소리에 조금 당황하셨는지 기사님은 갑자기 운전에만 집중하셨다. 내가 먼저 아저씨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길게도 말고 매우 짧게. 어차피 병원에서 집까지는 택시 타고 고작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 하이고.....


아저씨는 한 손으로 눈물을 슥슥 훔치셨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기분 좋았던 택시 기사님을 숙연하게 만들었나. 행복한 아저씨에게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라서 마음이 또 울렁거렸다. 얼른 내리고 싶었다. 신호등 세 개만 더 지나면 곧 내릴 수 있다. 조금만 참자.


- 아가씨 있잖아요. 다음에도 택시 탈 일 있으면 차라리 택시 안에서 실컷 울어요. 택시는 어차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사라지잖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떠들어도 돼요. 어차피 우리는 별의별 사연 다 듣거든. 그리고 아가씨 아직 새파랗게 젊고, 아 나는 지금도 아가씨 나이가 안 믿긴다니깐? 학생같이 생겨서! 이렇게 젊은데 친구 같은 더 좋은 남자 새로 얼른 만나서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아이고 나도 딸이 있어서 내 마음이 다 찢어지네. 근데 하나 확실한 건 이거 금방 끝나. 아가씨 진짜야. 내가 올해 쉰일곱이거든요? 갑자기 비도 오고 그러다 해도 뜨고. 분명히 해 떴는데 비가 같이 내릴 때도 있잖아. 그게 인생이야. 아가씨한테 지금 내리는 비는 곧 지나가요.


올해 쉰일곱 살에 해남이 고향이신 택시 기사님 덕분에 오늘은 빗소리 ASMR을 틀어놓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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