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실린 숨결

고요히 채우다

by 샤일로

창문 밖 풍경은 날씨만큼 얼어붙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 표지판 앞에도, 초록빛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도, 나무 아래 평상도 모두 비어 있었다. 검은 건물마다 인공조명이 어색하게 자리 잡았다. 분홍, 노랑, 보라, 파랑. 갈 곳 잃은 별들은 떠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택시 안에는 익명의 사연을 전하는 라디오 DJ의 속삭임만 들렸다. 창문을 열면 그 목소리도 바깥 정적에 묻힐 것만 같았다. 시간이 멎은 듯, 숨 죽은 새벽이었다.


건물 사이를 나오자 검은 배경 위로 흰색 수평선이 그어졌다. 광안대교 아래로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다.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검정 물감으로 캔버스를 두텁게 칠한 듯 정지된 화면 위에 붓질이 더해졌다.


별들은 보이지 않고 정적만 감도는 어둠 속에서도, 시간과 바다는 여전히 맞닿고 있다. 파도는 밤을 흘려보내고, 새벽은 아침을 부른다.



도로 위를 긁는 바퀴 소리. 격앙된 모르는 이의 전화 소리. 종이처럼 구겨지는 바람 소리.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여러 잡음과 뒤섞였다. 혼잡한 장면 속,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른 수평선은 말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소란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닷가로 걸어가다 보니 소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조금 전 지나친 사람들과 자동차는 어느새 흐릿해졌다. 하늘보다 짙은 바다 표면에 윤슬이 쉴 새 없이 빛났다. 새벽 무렵 떠난 줄 알았던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보다. 아직 지니고 있던 불빛은 파란 물결 위에서 한없이 반짝였다. 헤드폰을 벗고 나서야 바다빛에 실린 소리가 들렸다.


파도 소리에 이끌리듯 한숨이 나왔다. 조여진 내면에 틈을 만들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을까. 바깥 소음들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실 가장 소란스러운 건 외부가 아닌 내면이었다. 삶의 현시점에서 정체된 듯한 불안은 머릿속 생각과 감정을 조급하게 다룰 뿐 막상 어느 곳에도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 바다는 매번 다르지만 일정한 파도를 그렸다. 투명함에 더해지는 명암과 깊이. 그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단어로 담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언어로 가두기를 멈추고 보이는 장면과 들리는 소리로 채워지기를 기다렸다. 눈앞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단어들은 바다 바람에 흩날려 보내고, 감각의 흔적만 남겨두기로 했다.


물 위에 시간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조급한 마음을 바람의 잔상이 덮는다. 파도 아래로 한숨이 가라앉는다. 내면의 동요가 멈추고 그 공간이 비워지면 시간은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 호흡에 맞추어 숨을 고르고 내뱉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온전히 그 장면과 나의 감각이 어우러질 때의 고요함을 맞이한다. 모래에 걸쳐진 파도는 바다의 끝자락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애초에 이 드넓은 바다를 나의 시야에 담을 수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 품에 기대어 본다.


시간의 숨소리는 어느새 소란스러운 내면에 정적을 가져온다. 그렇게 다시 호흡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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