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보시 고젠, 강렬한 삶의 궤적이 빚은 강렬한 성품
모노노케히메의 등장인물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의 수장으로 품격과 당당함을 지닌 강인한 여성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타타라 마을을 지키며, 마을 사람들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 헌신한다. 사회가 백안시하는 약자들에게 설자리를 마련해 준 자애로운 리더이자 뛰어난 비전으로 험난한 시대를 헤쳐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
다수설은 에보시를 ENTJ로 본다. 특출난 카리스마로 마을을 이끌고 평시엔 침착한 리더지만 전투에선 겁이 없고 용맹하다. 나도 처음에 그녀가 ENTJ라고 느꼈고, 다수설 자체에 별다른 결함은 없다고 본다.
문제는 단순히 '뛰어나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진보적인 그녀의 비전. 대략 14세기 중세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 속 그녀의 행동은 무척 급진적이다. 천민 신분인 몸 파는 여성들을 돈 주고 사와 자유 시민으로 살게끔 하고 남자와 대등히 일하도록 독려한다. 기피 대상인 나병 환자들도 받아들여 총기 제작술을 가르치고 공동체에 기여할 길을 터주었다. 약자 통합 이슈는 21세기의 현대 사회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문제다. 그것을 중세의 신분제 일본을 살아가는 여성 리더가 착착 현실로 만들고 있는 것. 그녀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는 700년이 지난 지금 기준으로도 급진적이다.
에보시 타입핑의 난점은 그녀가 ENTJ의 강점과 INTJ의 강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주기능과 부기능 사이의 우열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대등한데, 그게 너무 이질적이다.
"ENTJ와 INTJ는 고작 한 글자만 다르니깐 닮은게 당연한 게 아니냐, 두 유형 공히 스택 상 {Ni, Te}를 가지므로 비전이 좋고, 추진력도 뛰어난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유형의 차이가 단지 부품들 함량차에 따른 스펙트럼 이슈라는 생각일 것. "닮아있는 가운데 ENTJ는 INTJ보다 추진력이 좀 더 뛰어나고, INTJ는 ENTJ와 비슷한 듯 하면서 비전이 좀 더 우수하다"는 식의 생각.
하지만, MBTI라는 도구는 ‘전체를 편의상 분절’해서 사고를 돕는 멘탈 모델일 뿐, 결국 현실 속 인간은 (픽션의 인물도 마찬가지) 통합체로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쉽게 말해, ENTJ와 INTJ는 질적으로 다르며, 두유형 간 차이는 단순 양적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보통 둘의 차이가 단지 ‘E’가 좀 덜하냐 더하냐의 문제로 생각되는 건 MBTI 검사 형식의 한계 때문이다(*이 논점은 복잡하니 언젠가 따로 다룰 예정이다). 어쨌든 에보시에게서 두 유형이 중첩돼 보이는 양상은 내가 보고 들은 어떤 케이스에도 찰싹 들어맞지 않았다. (허구의 캐릭터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뭔가가 이상했다.
뛰어난 혜안을 지닌 정신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종횡무진 전쟁터를 누비는 무투파 그녀. 제갈량의 지략을 지녔지만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날린다. 그뿐인가? 나병 환자와 몸 팔던 여성들을 받아들여 마을의 몸집을 불리고, 기존 성역할을 깨뜨려가면서 마을의 노동 편제를 재조직해 낸 명재상이기도 하다. 어버이처럼 자애롭게 백성들을 대하다가도, 필요하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사지로 내몰고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다방면에 걸쳐 이율배반적 특질들을 한몸에 갖추고 있는 걸까? - 에보시를 INTJ로도, ENTJ로도 틀짓기 망설여지는 이유였다.
분명 그녀는 사기캐다. 뜯어볼수록 그렇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임을 감안해도 에보시 인격의 폭은 비정상적으로 넓어서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선명하게 지니고 있다. 유형론으로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I인데 E이고, N인데 동시에 S다. 단순히 점수가 50대 50이라는— 균형이 좋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자면 I가 100%인데, E도 100%라는 이야기. 마치 두 명의 사람 같이. 그녀는 야생의 포식자처럼 맹렬하게 투쟁하다가도 평화로운 국면에선 또 원래 그런 사람인 양 한없이 점잖다.
그러나, 타입을 판별하겠다고 떨쳐 일어난 이상 결론은 내야 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어느날, 나는 에보시의 성격에 대한 단서를 영화 밖에서 찾을 수 있었다.
https://www.nishinippon.co.jp/item/n/645746/
이 링크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 의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에보시 고젠의 과거를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에보시는 원래 시라뵤시 무희로 일하고 있었다. 시라뵤시란 연회에서 남장을 하고 춤을 추던 여성 무희를 말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해외로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바닷길에서 해적의 포로로 잡혀 해적 수괴의 아내가 된다. 그렇게 해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녀는 빼어난 자질로 점차 두각을 나타낸다. 영화 속 그녀의 측근이던 곤자는 바로 이 시절 그녀 남편의 수하였다. 에보시를 존경한 곤자는 그녀를 잘 따랐다. 에보시는 그와 결탁해 남편을 살해하고 재산을 차지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다.
에보시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나서 무릎을 탁 쳤다.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 그림이 맞춰졌다.
그녀가 몸파는 여성들의 권익에 동정적이었던 것은 여권 신장에 대한 진보적인 비전을 품고 있어서라기보다, 노예로 팔려 갔던 자기 경험에 기반한 인간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해적 남편과 해적 생활을 했으니 전투 센스와 명나라 화승총에 대한 지식도 자연히 설명이 된다.
자기 운명의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하층민에서 해외이주자로, 이주자에서 포로로, 다시 범죄자의 아내로 떠밀리며 살다가 극적으로 운명의 주도권을 탈환한 경험의 특별함. 에보시 고젠은 이른바 '각성한 자'다. 주도권 없는 삶은 일분일초도 살지 않겠다고 결의했을 것이다. 죽음도 개의치 않는 듯한 초연함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다. 극중에서 아시타카가 그녀를 향해 “당신 안에도 요괴가 있다”고 지적했던 건 바로 그녀의 이런 면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에보시의 타고난 성격을 INTJ로 판정한다. 하지만 극한의 진폭을 경험하며 그녀의 성격은 질적 변화를 겪었다. 죽음과 살을 맞대고 뒹구는 동안 위험에 대한 감각과 힘에 대한 성찰이 첨예하게 진화한 INTJ-로 본다.
아드레날린이 뿜어나오지 않을 때의 에보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태도는 정중하고 표현은 절제되어 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삶을 구원해 주는 관대한 리더지만, 말과 행동의 온도로만 판단한다면 오히려 마을 주민들과 거리를 두는 듯 냉담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마치 직접적인 스킨십은 원치 않는다는 듯 홀로 높은 곳에 머무는 느낌. 그리고 바로 이 점이 ENTJ와는 다르다. 본래 성격이 INTJ라고 보는 이유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태도는 360도 달라진다. 전쟁의 어법을 완전히 체화한 듯 병사들과 동고동락하고, 긴박한 국면에선 제일 앞줄에서 위험을 향해 돌진한다. 사슴신을 죽이기 위해 제일 먼저 뛰쳐나간 것도 그녀였다.
이럴 때의 에보시는 과장되게 느껴질 만큼 투쟁심이 강하다. 성격의 나머지 부분과 비례가 어긋나는 느낌. 바로 이 점 때문에 T타입인 ENTJ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면은 해적단을 이끌던 시절 몸에 익힌 리더십으로 판단하기로 한다. 바다의 거친 범죄자들을 리드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입만 털어서는 영이 서지 않는 법이다.
요컨대, INTJ로 태어난 그녀는 비참한 상황을 숱하게 겪으며 자아가 깨지고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부기능 Te를 완전체로 발달시켰다. 상황이 터프한 리더를 필요로 하면 그녀는 즉석에서 ENTJ 완전체로 변모한다. 필요에 따라 내면의 현장 사령관(The Field Marshal -ENTJ의 별칭)을 자유로이 호출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천연 ENTJ는 아니기에 마을에 귀환해 평화의 시기를 보낼 때에는 INTJ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목소리는 조용조용하고, 목적 없는 행동은 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자리에는 동석하지 않는다. 일상으로 복귀한 전쟁터의 여포는 혼자만의 고즈넉함을 소중히 여기는 제갈량이 되는 것.
에보시 고젠의 타입핑은 여기까지다. 그녀는 INTJ 이지만, 드라마틱한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부기능이 극한까지 발달된 인물. 그래서 ENTJ로 보이는 인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