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타입 빌런의 최고봉, 영화 미저리의 애니 윌크스 성격분석
영화 미저리(그리고 스티븐 킹의 동명소설) 속 빌런 애니 윌크스는 ISFJ 성격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출처에서 굉장히 일관되게 나타나는 견해. 영화 초반 작가 폴 셸던을 구호하고 살뜰히 보살핀 점, 그리고 전직 간호사라는 직업 등을 고려한 추정이라고 짐작한다. 극 초반, 친절하면서도 푸근한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SFJ 성격의 특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직업이 간호사인 캐릭터를 두고 ISFJ라 하는 말을 들으면 자동반사처럼 경계하게 된다. 왠지 함정 같달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뛰어나고 봉사심 가득한 ISFJ의 대표 적성으로 간호사가 언급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등치는 곤란하다. 같은 이유로 무당이나 영매 캐릭터에 무조건 INFJ 스탬프를 찍는 것, 영화 속 운동선수나 댄스 가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ESFP 라벨을 붙이는 것에도 회의적. 그러나 경계한다고 했지 무조건 부정한단 뜻은 아니다. 더 면밀하게 검증할 필요를 느낀다는 이야기.
내가 처음 다수설에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애니 윌크스의 극단적 통제 성향 때문이었다. 분노를 터뜨리며 상대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ISFJ 원형과 상반되어 보였던 것이다. 꼼꼼하게 정돈된 집안 물건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고 싶어 하는 강박적 욕구와 집착. 상황이 맘에 들지 않을 땐 실력 행사도 꺼리지 않는 태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내향 감각(Si)과 외향 사고(Te) 기능을 갖춘 ISTJ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통 ISTJ는 ISFJ에 비해 주변 환경에 대해 직선적인 통제 성향을 보인다. 영화에서는 폴 셸던 또한 그녀의 ‘환경’에 해당하는데, 애니는 그의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처벌과 보상을 번갈아 가며 그를 길들인다.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도 불사한다. 소통 방식에 있어서 ‘감정적 호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효과적 통제를 위해 무자비한 압박도 꺼리지 않는 점에서 Fe보다는 Te를 부기능으로 갖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상대를 자기 통제 하에 가둬놓고 철저히 자신에게 의존케 한다. 그의 사상(예술 창작)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고, 말을 듣지 않으면 힘으로 꺾는다(오함마로 내리친다). 이런 행동을 외부 세계에 구조와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욕구로 해석한다면 이는 외향적 사고(Te)의 특징이다. 애니는 폴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제어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주어진 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이 하나 나올 법하다: 통제적인 행태는 ISTJ에게만 있고 ISFJ에게는 없는 것인가? Fe 타입은 통제를 하지 못하나? 물론 그렇지 않다. Fe나 Te나 같은 판단 기능으로서 외부 환경에 개입해 사태를 제어해 나가는 점은 같다. 다만 통제의 수법(modus operandi)이 다르다. Fe가 타인의 감정을 재료 삼아 정치적인 의사 결정을 하며 은근한 압력을 선호한다면 Te는 그보다 직선적 방식을 선호한다. ISTJ만이 통제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ISTJ의 방식이 (ISFJ에 비해) 통제의 전형적 모습에 더 가까울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성격유형은 정신병리적 증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바꿔 말해,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애니 윌크스의 행동을 정상 범주에 놓고 억지로 유형판단을 했을 때 Te의 특질이 보였다는 이야기이지, 오히려 정상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이상 행동(경계성 장애의 특징을 보이는)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판단은 달라져야 한다.
애니 윌크스는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다. 영화 속 그녀의 잔인한 행동은 그런 병리적 원인에서 유래한 것이지 성격유형의 일반적 표현으로 봐서는 안된다.
깊이 고심한 결과, 나는 다수설에 찬동하기로 한다. 애니 윌크스는 ISFJ 유형이다.
앞서 애니의 ISTJ 여부를 검토할 때 살펴봤듯 통제 행위는 Te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Fe 또한 자신의 환경을 통제한다. 건강하지 못한 ISFJ유형은 타인을 돌보는 중에 뭔가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자신의 봉사가 적절한 감사와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짜증을 내거나 통제 성향을 드러낼 수 있다.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ISFJ유형. 사회적 역할에 순응하고 의무감이 강하다. 안전과 확실성을 중요시한다. 폴에 대한 강박적 돌봄 행위는 그런 ISFJ적 특성의 전형적 표현이다. 폴의 소설 <미저리>에 대한 그녀의 집착 또한 친숙한 세계관에 대한 애착으로 읽을 수 있다. 폴의 마지막 원고를 읽은 후 애니의 트리거가 발동되는데, 그건 친숙한 세계관이 무너질 위협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는 급격한 변화에 저항하는 ISFJ의 특성과 일치한다.
외향 감정(Fe)은 사회적 인정에 무척 민감하다. ISFJ도 Fe를 부기능으로 가지므로 역시 타인의 인식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전직 간호사로서 애니는 자신의 서비스 역량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친히 타자기를 사다 줬는데 폴은 잉크가 용지에 번진다는 클레임을 건다. 그러자 애니의 태도가 급변한다. 방어적 태도로 짜증을 내더니 급기야는 그의 아픈 다리를 가격하고 방을 나가버린다(소설 원작에서는 폴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었다).
자신의 사적 커뮤니티를 수호하고 그 구성원의 복지를 관장하는 건 ISFJ 정체성의 큰 부분을 이룬다. ‘보호자(protector)’라는 유형의 별명에 수긍하는 ISFJ들이 많을 정도로 기질의 코어를 이루는 특징이며 자긍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폴의 컴플레인에 대한 애니의 분노는 자신의 돌봄 행위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고객불만으로 이어지자 순간적으로 방어벽을 세운 것으로 보면 된다. 외부를 강하게 공격함으로써 손상된 내면의 자존심을 지켜내려 한 것. ISFJ들의 사회적 페르소나는 대체로 유순한 편이지만 이처럼 자기의 관리영역 안쪽에서 자기 보호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통제적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폴과 대화 중 애니는 작품 속 욕설 사용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 작가가 직접 “등장 인물이 슬럼가 출신이므로 욕설을 쓰는 게 자연스럽다”고 해명을 하는데도 그녀는 완강하다. 욕설에 대한 혐오감은 애니의 외향적 감정(Fe)에 기반한 도덕 관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ISFJ들은 기본적 에티켓에 대단히 민감하다. 기본 매너가 좋지 못한 사람을 곧장 악한 사람으로 속단하는 경우도 있다. 성급한 판단일 수 있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는 인상. 상스러운 말을 쓰는 행동을 근원적 인격적 결함의 한 징후로 해석하는 것. 애니는 이보다 더 나아간다.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욕설을 써서는 안된다"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것.
남에게 요구하는 덕목은 자신도 지켜야 한다. 애니 윌크스는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욕설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신, 자기만의 유치한 대체어로 만들어 사용한다(예: “Cockadoodie”, “Dirty bird”). 하지만 영화 막판, 폴과 육탄전을 벌이는 씬에서는 그런 점잖은 가면도 벗겨지고 만다. 폴을 “Cocksucker!”라고 부르며 거침없이 쌍욕을 날린다.
처음엔 과격한 통제 성향 때문에 ISFJ보다는 ISTJ유형으로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주인공 애니 윌크스(Annie Wilkes)가 성격 유형의 정상적 범주를 넘어서는, 각종 정신병리적 이슈(BPD 등)를 지닌 문제적 인물이라는 전제에서 분석을 출발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격장애의 특징들을 최대한 분리해 판단하려고 했다. 무슨 말이냐면, 병리적 이슈로 왜곡되기 이전의, 애니 본연의 성격 유형을 추론하려 했다는 뜻이다. 그게 ISFJ유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위에서 충분히 논했다.
앞서 <간호사= ISFJ>라는 등식에 반대한다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분석을 마친 지금은 ‘공동체 내에서 유의미한 서비스 역을 추구하는’ ISFJ적 성향이 애니 윌크스와 싱크로율이 높다고 보고 있다.모든 간호사가 ISFJ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애니 윌크스는 간호사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서 그 직업을 선택했을 것으로 본다는 뜻. 그만큼 그녀는 ISFJ의 전형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녀가 건강한 심리 상태였다면 정말로 간호사가 천직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마음이 건전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환자를 여럿 살해하는 비극을 낳고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