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만의 진료
육종암 환우분과 안산에서의 첫 만남
나는 지난 3월에 목, 폐, 복부 모두 깨끗하다는 진료 결과를 듣고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해봐도 좋겠다는
진료를 받았었다. 그렇게 나는 싱그러운 봄을 맞이하였고 뜨거운 여름을 제주에서 아들과 함께 보냈다.
두 계절을 보내고 나니 다시 검진일이 다가왔고 늘 그랬듯이 CT를 찍고 3주 뒤 진료를 기다렸다.
어제가 그날이었다. 늘 그렇듯이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신촌으로 갔다.
나는 어제 오후 2시 10분에 신촌 세브란스에서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나는 서울에 진료를 보러 가는 김에 서울에 사시는 귀한 분을 만나기로 했다. 나의 육종암 브이로그 채널을 구독하고 계신 구독자분이신데 나와 같은 육종암 환우분이셨다. 나는 혈관지방육종이고 그 구독자 분은 자궁육종암이셨다. 그리고 그분도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자연치유를 하고 계셨다. 나는 희귀암 육종암 환우를 뵐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반갑고 기뻤다.
구독자님도 그날 S병원에서 오전에 펫시티를 찍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래서 정오쯤 서울 안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좀 더 일찍 가서 여유 있게 안산을 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차가 너무 많이 막혀서 약속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나는 봉원사에 주차를 하고 안산 자락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안산은 맨발 걷기를 하기에 좋은 산이었다. 맨발러들도 많았고 황톳길과 황토 웅덩이도 있었다.
서울에 이렇게 좋은 자연환경이 있다니 놀라웠다. 서울특별시가 괜히 특별시가 붙은 게 아닌가 보다.
소나무와 잣나무, 메타세콰이어 등등 굵직굵직한 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구독자님이 오실 때까지 나는 안산의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20분 정도 걷고 나서 구독자 분이 안산에 올라왔다며 샤론스톤님 어디 계시냐고 전화가 왔다. 나는 구독자님이 계신 곳으로 맨발로 빠르게 돌아서 걸어갔다.
단발머리에 수수하고 단아한 외모의 여성분이 맨발로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단번에 구독자님임을 알아차리고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서로 만나자마자 건치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포옹을 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구독자님은 나보다 한 살 위의 언니였고 8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 치병업자였다.
우리는 여러모로 서로 닮은 점이 많아서 보자마자 이심전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치병을 하면서 나는 많지는 않아도 몇몇 환우분들을 알게 되었는데 환우분들 평균 나잇대가 50은 되었다. 그런데 뭔가 또래의 같은 종류의 희귀암 환우분을 만나니 또 다른 결의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전업치병업자로 산으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산이라는 큰 섬에 홀로 있는 듯했다. 이 두 가지 투잡을 뛰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찼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안산의 오솔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첫 만남이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 쉽게 말하기 힘든 암과 치병의 이야기들을 정말 편안하고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구독자님도 자연치유의 길을 잘 걸어가고 계셨다. 우리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육아와 치병을 함께 어깨에 지고 가는 진땀 나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같은 아이 엄마로서, 또 같은 육종암 환우로서, 같은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가는 전업치병업자로서 서로 공감되는 지점들이 많았다. 육아와 치병을 함께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다. 나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내가 내린 자연치유의 결정을 응원해 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다소 와일드하게 부모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 주말에 아이를 데려가셔서 종종 아이를 돌봐주셨다.
주말에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지만 나는 늘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럽고 괴로웠다.
구독자님의 경우에는 구독자님이 오롯이 치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양가에서 교대로 아이를 돌봐주셨다고 한다. 이렇게 양가에서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환경이라면 한 시름 덜으신 거라고 구독자님은 너무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독자님의 고민은 생각지 못한 또 다른 곳에 있었다.
구독자님의 친정어머니께서는 자연치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많이 하셔서 식단과 관련하여 모든 것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그런 세심한 케어의 뿌리에는 어머니의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이 자신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속에서 속박되는 것 같고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구독자님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하신 분이셨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결국 자연치유의 핵심은 나와의 대면이라는 것에 서로 크게 공감하였다.
결국은 내가 혼자 걸어가며 나 자신을 대면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자연치유의 민낯을 보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은 아무리 가까운 부모, 남편, 자식과 같은 가족 관계도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가는 환우에게 가닿을 수 없는 간극이 있고 그 간극의 거리를 서로가 받아들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건강한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말이다.
구독자님은 최근 검진 결과에서 우측 폐 하엽에 약 6mm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아직 남편과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고 자신은 이 상황이 덤덤하며 그동안 해왔듯이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갈 생각이라고 했다. 구독자님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큰 탤런트를 가지고 계셨다. 사실 치병에서 가장 어려운 게 편안한 마음을 쭉 가지고 가는 일인데 말이다. 나는 그런 부분에 너무 취약했던 편이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것은 굉장히 큰 탤런트고 그 마음을 쭉 변치 않고 가져갈 수만 있다면 승리는 보장된 일이다.
우리는 또 폐전이 진료를 받았을 때 의사와 나눴던 대화도 어쩜 이렇게 똑같냐고 똑같은 의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구독자님께서는 육종암 선고를 받았을 때 희귀 암이라서 청천벽력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항암이 안돼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그저 혼자 늘 독백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기에 나는 그동안 그 누구와도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독자님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동네 엄마들이나 친구들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사실 어쩌면 정말 내밀한 마음의 저 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독백이 툭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구독자님은 마치 메아리 같이 느껴졌다.
구독자님은 내게 어떤 계기로 자연치유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셨다.
나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판단을 내려서 한 것은 아니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해서 한 것이었다. 내가 그날 주치의 교수님의 진료실에서 받은 느낌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속 솔직한 심정은 '의사도 잘 모르고 있는데 아는 게 그것뿐이라 수술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뭘 믿고 내 폐를 또 맡겨야 하나? 의사는 수술할 수 있을 때 하라는데.... 나중에 다 퍼져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수가 있다는데 수술을 일단 하는 게 맞는 건가? 어떡하지? '
그리고 진료 결과를 가족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가족들은 당연히 수술을 해야지로 결론이 났고 나는 수술 날짜도 다 잡아서 폐기능 검사까지 다 마쳤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나의 마음속에 '이것이 맞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득 보다 실이 큰 것 같은데...... 또 폐를 잘라내야 하다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3박 4일간의 수술 일정이 나왔는데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기로 하고 남편이 수술 둘째 날에 휴가를 낼 수 있어서 둘째 날은 남편이 오고 첫째 날은 어떡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남동생에게 부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남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남동생은 정말 난감하다는 듯 "그냥 아빠한테 부탁하면 안 돼? 아빠가 해줄 수 있잖아."
"아빠 일하시잖아. 오후 5시까지만 있어줄 수 없냐? 어렵냐? 코로나라서 pcr검사도 받아야 된다고 하던데......"
"후......"
"야. 됐어. 필요 없어. 일 열심히 해라. 끊어."
나는 너무 슬펐다. 동생이 일이 바빠서 와주는 게 힘들 수는 있다고 생각은 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마음은 너무 서운하고 너무 슬펐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엉엉 울고 났더니 묘하게도 정신이 명료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냥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연치유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나의 비논리적인 자연치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수술 일정을 다 취소시키자 진료 일정이 다시 잡혔고 주치의 교수님께서 왜 수술을 취소하셨냐며 무슨 생각이시냐고 황당한 표정으로 물어보셨다.
"그냥 수술 안 하려고요. 득 보다 실이 더 큰 것 같아서요. 좀 느긋하게 지켜볼게요. CT 찍으면서 지켜보죠. 선생님."
"......."
"제 암이 그렇잖아요. 선생님. 수술한다고 해서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재발되면 또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그러면 너무 괴로운 인생인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데 손실이 너무 크지 않나요? 한번 잘라내면 복구도 안되는데....."
"하...... 전이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선생님이 제 생명을 책임지실 수가 없잖아요. 제가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좀 느긋하게 지켜보고 판단을 보류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매우 당황하신 것 같았다. 당황해서 말을 잃어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진료실에 침묵이 흘렀다.
"2달 뒤에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한 편으로는 자연치유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내려서 속이 시원했지만 그 결정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는 설악산 울산바위 급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논리성이 부족한 나의 결심과 행동들은 자연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자연은 예측 불가했고 비논리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특성이 자연치유의 큰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특성으로 자연치유의 길이 어쩌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논리와 합리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에 예측불가하고 비논리적인 길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나는 구독자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치유는 이론과 지식, 논리와는 전혀 다른 영역인 것 같다고 했다.
이걸 이론과 지식, 논리로 설명하고 설득할수록 자연치유스러운 자연치유를 말하게 되는 것 같아서
설명도 어렵고 따라서 설득은 더욱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좀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자연치유의 길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산을 걸으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구독자님도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고 나도 진료 시간이 다가와서 세브란스로 갈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조만간 다시 찐하게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 신데렐라처럼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갔다.
나는 바로 세브란스로 가서 도착 신고를 하고 몸무게와 혈압을 잰 뒤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렸다.
대기실 앞에 있는 커다란 TV에서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은 말기 환우들의 투병기 인터뷰가 나왔다.
세브란스 TV는 환우들의 처절한 투병의 이야기를 링 위에서 결투를 벌이는 복서에 비유하며 나름 드라마틱한 영상 연출을 했다. 현대의학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된 영상 연출이었다.
자연치유는 취권 하는 할아버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술에 취한 듯 헤롱헤롱 대지만 절대 암에게 틈을 주지 않는 맑고 영롱한 정신력으로 뒷발차기하는 순발력과 센스 말이다.
자연치유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는 암병동보다는 소림사를 가서 스승님을 찾아뵙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세브란스 영상을 보고 있는데 내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검사 결과는 아주 좋아요. 피검사도 다 좋고요. 목도 깨끗하고 복부도 다 깨끗하세요. 폐는 좋아진 상태로 깨끗하게 잘 유지되네요. 지금처럼 이렇게 검사하시면서 보시죠. 내년 1월이면 이제 보험이 끝나거든요. 그래서 그전에 한번 검사하고 간격을 조금 늘릴게요. 알았죠?"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네."
나는 이번에도 지난 3월의 결과처럼 좋은 소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정도 회사도 유지를 잘하는 것이 힘든 일이듯 자연치유도 다를 게 없다.
이제부터 나의 자연치유기가 서막을 열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