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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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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May 22. 2024

사랑의 이유

부엌


"선영이가 똑똑하네. 자기 객관화가 잘 돼. 그러니까 국화를 친구 삼았지." 잠에서 깨자마자 핫핑크 나이키 후드티를 머리에 넣으며 은주 언니는 말했다. 그리고 나갔다.


 

커튼을 젖히니 바다와 백사장이 한눈에 펼쳐진다. 대천 해수욕장이 내 마당이다. 우울하고 지쳤던 마음이 갠다. 컵 하나도 씻기 싫어 부엌 없는 호텔로 숙소를 잡았다. ‘오션뷰’로 하니 몇만 원 더 들었다. '결제 완료'를 누를 때 반찬값 생각이 나 조금 망설였는데 괜히 그랬다. 마시멜로우처럼 생긴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 들이켰다. 국화랑 은주 언니랑 새벽 두 시 넘게 깨어 있었다. 온전히 말만 있던 시간이다. 가볍고 무거운 것들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미친년처럼 웃고 울었다. 언니는 일곱 시에 일어나 바삐 나갔다. 국화는 저대로 두면 오후까지 잘 것이다. 타고난 저녁형 인간이다. 그래도 오늘은 할매처럼 아침잠 없는 날 위해 곧 일어날 것이다. 안 먹는 아침밥도 같이 먹어 주겠지. 그러고 보니 항상 얘가 맞춘다. 착한 사람. 단둘이 이렇게 있는 게 꿈같다. 아이들이 어려 고만고만할 땐 사는 곳도 끝과 끝이라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웠다. 육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 하루 이틀은 남편, 애들, 살림 다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구 말 따라 지나가는 일이었다. 


 

가느다란 몸을 휘청거리며 거실로 나온다. 새치 한 가닥 없는 새까만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눈을 비빈다. 잠 많은 빵순이. 1일 1라면을 하는데도 개미허리라니. 우리가 같이 믿는 신은 공평하지 않다. 나는 잠도 없고 빵도 싫어하고 라면도 잘 안 먹는데 말이다. 거실에 깔린 이불 위로 드러눕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감탄하며 돌고래 소리를 낸다. 언제나 밝은 '솔'톤 목소리인데 서너 음 더 높아졌다. "어머나! 선영아, 바다 좀 봐!" 진작에 봤다고, "너 많이 봐"라 말했다. 일어나 창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어머머, 저 남자 멋있다." 나한테 오라고 손짓한다. 옆으로 갔다. 젊고 건장한 남자가 두껍고 긴 막대로 백사장에 글자를 쓰고 있다. '민경아, 사랑해.' 그러곤 팔을 크게 흔든다. 해변으로 늘어선 숙소 어딘가에 민경이가 있나 보다. "여자는 얼마나 좋을까? 저 남편 정말 로맨틱하다. 그치?" 남편? 살짝 웃었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르군. 얘는 호텔방에 들어 있는 남자, 여자는 다 부부라고 믿는다. 성(性)이 부부 안에만 있어, 전국의 가정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도 있다. 예수쟁이라 그런가? 순수, 순진, 바보. 어떤 게 어울리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은주 언니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맞아, 국화의 이런 점이 사랑스럽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국화는 내게 맑고 밝은 세상을 보여 준다. 나는 드러운 걸 알려 주고. "부부는 무슨. 불륜일 거야."


 

사리 밝고 총명하고 셈도 잘하여 자기 앞가림 척척하는 그런 사람 부럽다. 나는 머리를 쓰면 쓸수록 구렁에 빠진다. 객관화는 교수님한테 들어 본 말 같은데. 내가 그런가? 교회에서 하도 겸손하라 하니 그러는 척하다 얻어걸린 것일지도. 나를 남 보듯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언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국화를 옆에 뒀으니 말이다. 내 모자란 걸 정확히 알았다. 세상 어두운 면만 보며 우울하게 살았을 인생에 이런 친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이건 똑똑한 게 아니라 지독한 이기심 같은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국화는 좀 전에 찍은 사진을 본다. 그러더니 내 팔을 살짝 때린다. "부부 맞잖아!"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을 확대해 보란다. '민경아 사랑해.' 밑에 작게 '여보가.'라는 글자가 있다. "음, 그랴. 니가 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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