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졸 Nov 04. 2024

어느 바지사장의 라면

회식  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줄어든다. 아니 거의 없나? 이럴 줄 알았으면 어른 같은 건 되지 않는 건데. 몰랐다. 다 맘대로 하며 사는 줄 알았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걸 먹고 졸리면 자고 성가신 일은 팽개쳐 두고 해가 중천에 오도록 늘어지게 자고 싶다.


그날은 라면이 진짜 먹고 싶었다.


모처럼 회식을 하기로 했다. 단톡방에 먹고 싶은 걸 말하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첫째는 누룽지나 끓여 먹으며 집에 있겠다고 한다. 오, 좋다. 경쟁자도 줄고 돈도 굳고. 나는 '분식'이라고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라면에 김밥과 떡볶이. 이보다 완벽 음식 조합이 있을까. 나머지 회원은 답이 없다. 다 동의한다는 뜻인가. 하하. 남이 끓여 준 라면은 더 맛있어서 군침이 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내 진동이 울려 도로 꺼냈다. 둘째다. '나는 감자탕.' 막내가 그 아래 '나도.'라고 답을 달았다. 우리 회(會)의 총무 겸 회계가 어느 편 손을 들지 조마조마하다. 내 직책은 회장이지만 아무 권한이 없는 '바지사장'이다. "저녁으로 분식은 좀 그렇네요. 감자탕으로 하죠."라고 결론을 낸다. 치, 내 의견은 완전 묵살이군. 조금 빈정상하였으나 뼈를 다 뜯고 국물에 라면 사리를 넣는 상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차로 40분을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싸고 맛있어서 '현지인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라나 뭐라나. 기름 값 생각하면 그 돈이 그 돈인데. 아니 그리고 인터넷에 다 올라 와 있는데 현지인은 무슨. 분식집에 못 가서 영 기분이 좋지 않으나 티는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어째 입이 열리지 않는다. 간판이 볕과 바람에 색을 잃어 허름하다. 문을 여니 사람과 음식 열기로 안이 후끈하다. 정말 동네 아저씨들로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탁자와 바닥에 술병이 그득하다. 다들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느라 소란스럽다. 구석에 딱 한 자리 남았다. 화장이 너무 진해서 그런지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아주머니가 쟁반에 반찬을 던지듯 상에 놓았다. "뭘로 하실라." "감자탕 중짜요."


같은 분이 크고 깊이 파인 냄비를 들고 와 버너 위에 올린다. 여느 감자탕과 다르게 뼈가 수북이 쌓여 있지 않고 다들 국물에 풍덩 빠져있다. "끓으면 부추 넣고 바로 자쑈." 깻잎이 아니고 부추? 왠지 맛이 없을 것 같다. 팔팔 끓길래 국물을 한 수저 떴다. 음, 뭐 괜찮네. 모두 뼈를 하나씩 챙겨 들고 부지런히 뜯는다. 마지막 뼈는 가위바위보로 결정했다. 나는 또 떨어졌다. 손을 번쩍 들고 '여기요.'를 크게 외쳤다. 아주머니가 인상을 잔뜩 쓰고 나에게 온다. 그 옆에 등은 쩍 벌어졌으나 순해 보이는 총각도 있는 왜 자꾸 저분이 오는지 모르겠다. "여기 라면 두 개랑 수제비 넣어주세요." "아따, 뭔 라면 사리를 두 개나 넣는 다요. 한 개면 충분하것소." 이거 참 오랜만에 당황스럽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을 하려고 우물거리는데 아주머니는 쌩 가버렸다. "그래 자기야. 몸에 안 좋을 걸 뭘 그리 많이 먹어. 하나만 해." "아빠 나도 배 불러." 내 입으로 내가 먹겠다는데 두 개든 두 박스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고추 하나를 된장에 푹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드럽게 맵네. 화장실이나 가야겠다. 오줌을 싸고 나오는데 아주머니 옆에 있던 등은 쩍 벌어졌지만 순해 보이는 총각과 마주쳤다. 나는 무슨 첩보를 전달하는 사람처럼 남자에게 몸을 가까이하고 "우리 테이블 알죠? 라면 사리 하나 더 넣어 주세요."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뜻대로 되는 건가. 입꼬리가 올라간다. 총각이 우리 쪽으로 온다. 손에 아무것도 없다. "저기, 사장님이 라면 두 개는 너무 많대요. 수제비도 하셨잖아요. 그게 불면 양이 상당하거든요." 사장님을 찾아 고개를 돌렸고 나를 째려보는 눈과 마주쳤다. 기분은 나빴지만 모자란 듯싶으니 더 맛있다. 3만 2천 원을 계산하고 나왔다.
 
소화를 시킬 겸 주변을 산책했다. 한참 걷는데 느닷없이 튀김집이 있다. 고구마튀김이 맛있게 보인다. 골고루 담아 달라고 말했다. 종이봉투에 새우, 오징어, 고구마, 김말이 튀김이 들어간다. 만 원을 주고 오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그런데 간장은? "아따 그냥 묵어도 간이 딱 맞어라. 그냥 묵으쑈. 싱겁게 먹어야 오래 산다 안 하요." 아니 이 동네 사람들 성격 왜 이래?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내 목숨이지 사장님이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아이들이 요구르트가 먹고 싶다며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갔다. 너구리 하나를 집었다. 집에 가서 다 자면 끓여야겠다. 히히. 집에 왔다. 요즘 <정년이>가 재밌다. 한참 보다가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아침을 맞아 버렸다. 아, 내 라면. 지금 당장 먹어야지. 곧장 냄비에 물을 올렸다. 아직 자는 총무 겸 회계한테 가 어깨를 흔들며 "내 라면 어딨어?"라고 물었다. 비몽사몽 눈을 게슴츠레 뜬다. "아, 그거 <정년이> 끝나고 애들이 부셔 먹던데."

참을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 평화를 사 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