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오랫동안 나를 지웠다

by 예하

어릴 때부터 나는 눈치가 빨랐다.

엄마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굳으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반추했고, 친구가 말끝을 흐리면 그 여백을 읽으려 했다. 누군가 조용해지면 내 탓인가 싶어 먼저 사과했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내가 나서서 풀었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참 어른스럽다고, 배려심이 깊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칭찬받는 법을 일찍 익혔고,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그 방식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없어야 한다는 것.

타인의 감정을 살피려면 내 감정은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타인의 자리를 지키려면 내 자리는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들 편안해했고, 관계는 유지됐고,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내가 투명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준다고.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지웠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지운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냥 피곤한 것이겠거니 했다.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잠시 멍해졌다. 내 감정을 설명하는 언어가 점점 줄어들었다. 남의 감정을 읽는 언어는 풍부했는데, 내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낯설고 어색했다.

그것이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타인에게는 쉽게 물었다. 요즘 어때, 많이 힘들어? 그 말을 건네면서도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오면 당황했다. 괜찮아, 라고 반사적으로 답하고 화제를 돌렸다.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 어떻게 꺼내는지를 몰랐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근육처럼, 그 감각이 굳어 있었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라는 진단을 받던 날을 기억한다.

의사 앞에 앉아서 몇 가지 질문에 답했고,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나는 그 종이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안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이제 공식적으로 나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단명은 설명이 되어야 했는데, 내게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서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내가 약한 것이다. 내가 예민한 것이다. 내가 부족한 것이다. 아픔의 원인을 찾을 때마다 나는 그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조금씩 지쳐 있었다.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눈치가 보이는 사람들, 혼자 버티다 조용히 무너지는 사람들. 우리는 왜 이렇게 혼자인가. 왜 이 사회는 서로를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가.

내가 무너진 것은 내가 약해서만이 아니었다. 마땅히 나눠졌어야 할 무게가 나 혼자에게 몰려 있었고, 마땅히 있었어야 할 것들이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에서 우울이 자랐고, 불안이 자랐다. 그것은 내 결함의 증거가 아니라, 이 사회가 한 사람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 미안함에서 시작된다.

오랫동안 타인을 아끼듯 나를 아끼지 못했던 것에 대한 고백. 남에게는 쉽게 건넸던 말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많이 힘들었겠다를 정작 나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뒤늦은 사과. 그리고 이제는 상처받고 지쳐버린 나를, 처음으로 '아까운 사람'으로 대접해 보려는 시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여전히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무겁고, 어떤 아침은 일어나기가 힘들다. 완전히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고, 다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이제는 힘든 날에도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말한다. 많이 힘들었겠다, 고. 잘 버텼다, 고.

그것이 내가 나를 지우는 것을 멈추고, 처음으로 나를 보기 시작한 방식이다.

이 글이 닿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자신을 지워온 누군가. 아프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 누군가. 나처럼 오래도록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온 누군가에게.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딱 한 가지만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지워온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