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사용 설명서

우리는 왜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가

by 예하

지금의 나는 그 애를 꽤 오래 들여다본다.


교복을 입고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열여덟의 나.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고,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그대로 멈춰버린 아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무서웠다. 학교라는 공간이, 거기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를 바라볼 시선들이. 몇 분을 그렇게 서 있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날의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완전히 이해한다고는 못 하겠다. 여전히 그 장면을 떠올리면 묘하게 불편하다. 그냥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우리 사회는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단 하나의 언어만 가르친다. 성적. 석차. 등급. 그것이 곧 너의 가치라고. 교실은 매일 그 언어로 가득 찼고, 나는 그 언어 안에서 내가 얼마짜리인지를 끊임없이 계산했다. 두려움의 실체는 꽤 구체적이었다. 성적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성적이 나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웠다. 틀린 답을 말할까 봐, 멍청해 보일까 봐, 이상한 애로 찍힐까 봐. 모든 두려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타인의 눈이 있었다.

그것이 오롯이 나만의 예민함이었을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신을 평가하도록 훈련받는다. 잘했어요, 참 착하다, 역시 다르네,, 칭찬은 언제나 누군가의 눈을 통해 왔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도 타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내면화한 채 학교에 앉아 있었고, 그것이 너무 무거워지는 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학교를 빠진 날, 이상하게도 집의 고요함이 좋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공간.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그냥 있음'이 오랜만에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 후로 몇 번 더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위가 뒤집히는 것 같았고,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것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다. 나약함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친 날들이 쌓일수록 죄책감도 쌓였다. 빠진 수업, 못 낸 과제, 어색해진 친구들. 돌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무도 그 몸의 신호를 읽어주지 않았다. 학교도, 어른들도. 위가 뒤집히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불안의 증상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다들 말했다. 요즘 애들은 너무 나약하다고. 우리 때는 다 버텼다고. 사회는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감정을 읽는 법 대신, 감정을 누르는 법을 가르쳤다. 나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그래서 더 깊이 가라앉았다.


우울에는 사용 설명서가 없다.

병원에 가면 진단명은 받을 수 있다. 우울증, 불안 장애, 사회공포증. 이름은 있다. 하지만 이름이 생겼다고 해서 다루는 법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면 약을 주거나, 상담을 권하거나, 생활 습관을 바꾸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빠진 느낌이 든다.


빠진 것은 이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름의 병을 앓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

우리는 모두 다르다. 지문의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웃는 방식도 상처받는 지점도 다르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흘려보내고 누군가는 며칠을 앓는다. 아픈 이유도, 아픈 모양도, 아파하는 방식도 전부 다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그토록 다른 우리가, 병원에 가면 같은 이름표를 달고 나온다. 우울증. 불안 장애. 마치 우리의 고통이 하나의 틀 안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처럼.

그 이름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궁금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왜 이토록 비슷한 이름으로 수렴하는가. 지문이 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닳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바닥의 문제가 아닐까.

우울과 불안이 이토록 흔해진 것이 단지 개인의 결함인가, 아니면 이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의 문제인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 질문을 개인의 방 안에 가둬왔다. 아픈 사람이 알아서 고쳐야 할 문제로. 하지만 설명서 없는 기계를 건네받은 사람에게 왜 못 다루냐고 다그치는 사회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도망쳤던 나를 어떻게 받아들였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여전히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목 어딘가가 조여드는 느낌이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 기억이 떠오르면 빨리 덮으려 했다. 지금은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판단하지 않고. 결론 내리지 않고.


당신은 어떤가. 빨리 덮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아직 꺼내지 못한 채 어딘가에 접어두고 있는 시절이 있는가. 그리고 혹시, 그것이 온전히 당신의 잘못이라고 믿어왔는가.


우울에 사용 설명서가 없는 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애초에 아무도 건네주지 않았다. 그 빈자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달라질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하지만 질문의 방향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는 시작되는 것 같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