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배우처럼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 있다

by 예하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문득 깨달은 적이 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웃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맞장구를 쳤던 것 같은데. 그런데 내용이 없었다. 친구들은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딘가 없었다. 몸만 무대 위에 남아 있고, 나는 이미 퇴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서웠다. 들킬까 봐.


그래서 더 웃었다. 더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척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대화가 아니었다. 아픈 티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배역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세계 최고의 배우이다


우리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그리고 그 극장에는 암묵적인 배역표가 있다. 아픈 사람은 아프지 않은 척해야 한다. 힘든 사람은 힘들지 않은 척해야 한다. 예민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고, 무너지는 것은 무대 매너를 해치는 일이다. 아무도 대놓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어떤 배역을 맡아야 관객의 눈총을 받지 않는지. 어릴 때부터, 서서히, 우리는 그 역할을 외운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오래, 철저하게.


병원에 오랫동안 가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진단명이 붙으면 각본에 없는 대사를 치는 배우가 되는 것 같았다. 그냥 좀 예민한 것, 좀 지친 것으로 남아 있으면 아직은 무대 위에 설 수 있었다. 그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것이,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국 병원에 가던 날,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우울증. 불안 장애.


공식적으로 들켰구나, 그 생각이 먼저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종이를 가방 깊숙이 넣었다. 들켰는데도 또 숨겼다. 그 행동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진단명을 받은 뒤에도 공연은 계속됐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어두울 것이라는 편견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반대로 굴었다. 더 잘 웃으려 했고, 더 먼저 연락했고, 더 활발하게 보이려 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어쩌면 그때의 나는 정말로 세계 최고의 배우였는지도 모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올랐다면 수상 소감을 뭐라고 했을까. 아무도 몰랐다고. 정말 아무도 몰랐다고.


집에 돌아오면 탈진했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표정이 무너졌다. 분장을 지우듯. 아무도 없으니까.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그 문장이 안도인지 슬픔인지, 오랫동안 구분하지 못했다.



극장 밖에서도 공연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나만의 이야기일까.


주변을 보면 비슷한 배우들이 많다. 낮에는 완벽하게 배역을 소화하다가 밤에 혼자 분장실에서 무너지는 사람들. SNS라는 무대에는 웃는 얼굴을 올리면서 조명이 꺼지면 다른 사람들. 아프다는 대사를 삼키고 괜찮다는 대사만 반복하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무대에서 지치도록 연기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대를 설계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아픔을 결함으로 보는 시선, 힘든 것을 나약함으로 읽는 문화, 무너지면 퇴장당하는 구조. 우리는 그 극장 안에서 태어났고, 다른 무대가 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니 배우를 탓할 수 없다. 각본을 의심해야 한다.


진단명을 성적표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은 병이 아니다. 병을 결함으로 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이 내면화되면 아픈 사람은 아프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야 하는 짐으로 안게 된다. 무대 위에서 짐을 들고뛰어야 하는 배우처럼. 연기하는 데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정작 나아지는 데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각본에 없는 대사


전환점은 뜻밖에도 작은 질문에서 왔다.


상담 중에 치료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울증이 있고, 불안 장애가 있고,라고 말하려다 멈췄다. 그것은 내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었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진단명을 배역처럼 입고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이 나인 줄 알고.


비가 오는 날 창문 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억울한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화가 난다. 낯선 동네를 혼자 걷는 것이 좋다. 누군가 울면 같이 울어버린다. 그리고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웃었다는 것은 기억난다.


이것들은 각본에 없는 것들이었다. 진단받기 전에도 있었고, 진단받은 후에도 있는 것들이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조명이 꺼진 뒤에도 남아 있는, 진짜 나였다.


진단명은 내가 맡은 배역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무대의 이름이었다. 무대가 배우를 정의하지 않는 것처럼, 진단명은 나를 정의하지 않았다.


꼴등 성적표를 받은 사람이 꼴등인 것이 아닌 것처럼.



당신은 지금 어떤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가.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그 대사를 오늘 몇 번이나 했는가. 그리고 현관문을 닫고 나서, 혼자 있을 때, 그 대사가 진심이었는가.


언젠가는 무대에서 내려와도 된다. 관객이 없는 곳에서, 각본 없이, 그냥 있어도 된다. 연기를 멈출 때 비로소 진짜 당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당신은, 어떤 배역보다 훨씬 크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