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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단 Nov 16. 2024

내 마음속 과수원 9

일시적 기억상실

 일시적 기억상실 


새벽. 문득 잠에서 깨어 어둠 속의 '나'라는 물체를 발견한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느끼고,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을 느끼는데, 그 사실들은 내가 전혀 아는 바 없는 생소한 것들이다.

 어둡고 낯선 세계 속에 낯선 물체 안에 내던져져 있는 자신을 느낀다.


 이 생소한 곳에 이 익숙지 않은 물체 속에 오로지 혼자라는 생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허함으로 자신을 떨게 했고, 그 두려움은 너무나 커서, 마치 끝없이 어두운 우주 공간에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언제라도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나를 공격하고 함부로 하여, 끝 모를 괴로움과 고통 속에 휩싸일 듯, 숨 막히는 공포심이 자신을 지배하였다.


 아무것이라도 내게 친숙한 어떤 것, 도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러자 곧 주위 물건들이 늘 보아오던 낯익은 것들이고, 내가 살아왔던 익숙한 방 안에, 자신의 몸은 십수 년간 함께해 온 친숙한 물체임을 깨닫게 되었고, 살았다는 안도감에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뇌리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난 잠시동안 완전한 기억상실 상태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생소해할 만큼 완벽한 백지상태의.

 내가 살면서 쌓아온 모든 기억들이 지워지고 나니, 남는 것은 자신을 완강하게 지배하는 두려움과 공포뿐이었다.

 태반을 벗어난 신생아들이 왜 그리 결사적으로 울어대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대체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단백질과 수분의 상자 깊숙한 속에 걸터앉아 있는 나를 생각해 본다.

 내 생을 걷게도 달음박질치게도 하는 나. 내 몸의 살과 근육 그리고 그 안쪽으로 자리한 단단한 뼈. 물렁한 뇌리 속에 수백 수천조 개의 기억을 탑재하고, 그 안에서 나라는 육신을 조종하는 영혼.


 부지런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어떤 의미가 부여된 것일까.

 대자연 속에 피어나고, 인간 사회의 굴레에 묶이고, 수없는 상처와 아픔을 그리고 환희의 조각들을 안고 오늘, 내일, 언제인지 모르는 날들을 걸어가면서 그들이 도달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인간과 생물이라는 것들,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것들, 나와 내 영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회, 이들 모두가 어떤 결정에 의해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우주의 우연에 의해, 무수한 천체 중의 하나에 속한 작은 혹성에 던져져, 집단과 구속과 시간이라는 개념을 방패로, ‘무’라는 사실과 ‘홀로’라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죽음이라는 것은, 그나마 친숙한 사실들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공허와 고독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두려움을 자아내는 일인 것일까?

 그렇다면 삶은 이 우주의 고독과 공허를 잊기 위한 잠시간의 꿈인 것일까? 


 '나'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나'이어야 할까?

 이 넓은 우주 복판에서, 고독을 두려워하고 무의미를 의미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라는 영의 의미는?

 왜 '우리'일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영'은 항상 홀로이고 함께일 수 없을까? 왜 홀로이기를 두려워하고 함께이려 애쓰면서도, 결국은 홀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긴박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왜 무리를 지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잊고 있을 때가 많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이서 서로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먼저 앞으로 달려 나아가려 하고, 그 몸짓에 부딪치고 상처받아 서로를 미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데에 익숙하여, 왜 함께이어야 하는지, 어째서 홀로일 수 없는 건지 의문하고 불만스러워한다.


 사실 사람들은 멀리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훨씬 더 완벽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가까이에 다가가서 생활 내부를 들여다보면,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생활을 반복하고 있고, 직면한 현실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여, 무기력하게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타인이 필요한 모양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은 불안정한 생물체에 불과하지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고, 그보다 훨씬 더 큰 값어치를 인정하여 주는 타인들이 있음으로 해서, 자신에 대한 만족을 찾을 수 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만족 역시, 타인들의 기대치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그 성과를 거둠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인 모양이다.

 타인이 없다면, 나는 결국 한 마리의 생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정도 생물의 값어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나는,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인 나는,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삶에의 절대적인 사명감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잃은 자신의 모습은 몹시도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모습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끊임없이 타인과의 구속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필요성을 인정해 주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스스로가 만든 그 구속을 답답해하고, 애초에 전혀 원치 않았던 것인 양, 인연의 줄을 끊어버리기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각자의 값어치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서 바라본 상대방의 모습은 아름답고 정돈되어 보이지만, 가까이 근접하여 매일의 일상을 함께 꾸려가다 보면, 타인도 별수 없이 자신과 비슷한 한 마리의 생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츰 서로를 무시하게 되고, 상대방의 필요성과 가치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상대방을 미워하고 비웃고, 오히려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하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함께이어야 했던 관계는, 벗어나고픈 구속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이나 가정뿐 아니라 사람들이 오래도록 모여 생활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찬가지인 듯하다.

 어느 집단이든 타인을 비난하고 헐뜯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것은 바로 전염되어, 어느덧 모두가 서로를 비웃고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고, 그곳은 숨 막히는 지옥이 되어 버린다.

 한 집단에서 서로를 감싸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마냥 행복하고 즐거워지며, 그곳이 바로 극락이고 천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경쟁이 사람들을 발전시킨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그저 서로 자극하고 서로 발전시키는 정도의 선의의 경쟁이 아닌, 극도의 이기심으로 만연된 피 튀기는 전쟁터의 수위라면, 그런 경쟁심으로 가득 찬 사회는 모두가 멀찍이 물러서서 서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저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조급해하고 재촉하는 모습으로 공부를 하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고통과 채찍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되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남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사명감에서, 기꺼이 즐거이 하는 것이라면, 같은 일과 공부라도 그것이 곧 기쁨이고 보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혼자일 필요 없는 이 사회의 온갖 굴레가 모두 이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체계 속에서, 나는 '나'가 아닌 '우리'를 느낄 수 있고, 그에서 비로소 나는 나다운 의미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이 우주 벌판에 오로지 혼자라는 느낌이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인지, 나는 오늘의 순간적인 기억상실 상태에서 제대로 느껴보았다.

 만일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고독과 공허감을 잊기 위해, 인간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지, 왜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야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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