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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Mar 20. 2024

좀더 느리게 달려야 해

교사연구년의 시작 3월.

어릴 적엔

강 건너 산비탈 마을

기차가 지나갈 때

손 흔들었지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던 이가

바람에 모자를 놓쳤을 때

보기 좋았지


어른이 되어 기차를 타면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고 싶었지

강 건너 앵두꽃 핀 마을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

창밖으로 하얀 모자를 흔들다

명주바람에 놓아주고 싶었지


모자를 열개쯤 준비해

강마을의 아이가 손을 흔들 때

하나씩 바람에 날리는 거야


KTX는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달리지

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지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

사람이 기차고

기차가 사람이야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거 부끄러워


시속 삼십 킬로미터면 강마을

아이들과 손 흔들 수 있어

시속 이십 킬로미터 구간에선

초원의 꽃들과 인사 나눌 수 있지

시속 십 킬로미터면 초원의 소들에게

안녕, 무슨 풀을 좋아해? 물을 수 있어


......


  - 곽재구, <기차는 좀 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 중에서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게 부끄럽기보다는 힘겨웠다. 철이 든 이후로 늘 그렇게 종종거리며 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속도가 높아졌다. 이미 궤도에 올라선 탓에 내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일 형편이 못되었다. 내 뜻과는 무관한 속도 속에서 시간 안에 해치워야 하는 과제들을 해결하며 살았다.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무조건 해 내야만 하는 일들이 삶의 단계마다 많았다.


아이들 만날 생각을 하며 수업 준비하는 과정이 싫지 않았다. 이런 작품을 가지고 이런 방식의 수업을 하면 아이들 눈빛은 어떻게 빛날까를 상상하며 궁리하는 것은 즐거웠다. 물론 주말을 반납해 준비한 수업에 대해 아이들이 상상 밖의 반응을 보일 때는 울 것 같은 마음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종종 애들한테 하소연하기도 한다. 얘들아 나 이 영상 하나 너희들에게 보여주려고 주말 내내 영상을 삼십 개도 넘게 봤어. 그렇게 골라온 거니까.... 좀 봐줘. 샘의 의도와 정성을 좀 읽어줘...  


수업은, 내가 기울인 정성을 생각하면 빛나는 날보다는 참혹한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시도를 멈추지 않고 다음엔 이렇게 그다음엔 저렇게 다른 방식과 다른 내용을 찾았다.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을 수업 재료로 삼았다. 아름다운 노을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을 다음 주 수업 시간에 이야기의 소재로 끌어왔다. 아침 뉴스의 내용을 수업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뉴스를 들었다. 아이들과의 수업이 실제 우리 삶의 맥락과 닿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조금 쉬려 한다. 내일의 수업 내용과 밀린 업무를 생각하며 잠드는 밤을 그만하고 싶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행복한 내가 매일 수 백 명의 사람을 만나 수많은 말을 쏟아내는 것은 힘이 부쳤다. 이제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며 잠 깨고 싶다.


바람 부는 날 바람 속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긴 머리는 사방으로 나부끼고 바람에 시린 눈을 뜰 수 없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제는 바람 안에 놓인 삶이 아니라 바람 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려 한다. 휘청이는 나뭇가지들, 흩날리는 나뭇잎과 꽃잎들, 흘러가는 강물결과 흰 구름을 먼발치로 바라볼 것이다.


3월이 되었다. 교사연구년은 3월 1일부터 내년 2월 말까지이다. 이제 연구년 교사의 삶이 시작되었다. 느리게 달리는 기차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대이지만, 나는 시대에 역행하며 느리게 갈 것이다. 가장 느린 속도로, 아니 나의 성향에 맞는 속도로, 아니 무엇보다 내가 나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걷고 싶다.

나만의 기차 창문을 열고 하얀 모자도 흔들어야지. 초원의 꽃들과 인사 나누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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