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다 한 열정을 받아줘영
자전거를 타기만 했지
기본적인 정비에 대해선
아무리 기계치라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모르고 있다.
'바퀴에 바람이 없어요!'라고
‘미스터 미케닉'(자전거 블로거이자 본인 가게 운영)이 말했다.
‘열심히 타기 전에 바퀴에 바람부터 넣었어야지’
‘나는 무엇을 한 걸까.’
‘아 그래도 한 군데 아는 미케닉 씨가 생겨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미스터'가 훅 들어왔다.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나는
또다시 내가 여기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실패가 반복됐고 그 패턴에는
나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모든 건 잘 되면 내가 잘한 것이고
진심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늘 ‘한 사람‘이 있곤 했다.
나의 에너지를 분산하고
나를 실패의 늪으로 가게 만드는 ’ 사람‘의 위력은
관리되지 않은 채
관계도 몰락, 미션도 실패하고서야 끝이 났다.
왜냐 하면 ‘사람 관리가 곧 시간 관리’였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저마다 다 다르지만
시간만큼은 누구나에게 24시간이 주어지고 있다.
공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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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발행 예약을 누른 후 훌륭한 작가님의 시간에 관한 통찰을 발견하여 링크를 넣습니다~~)
같은 시간 안에 같은 미션을 받는다면
거기서 그걸 해 낼 수 있다는 말인데
왜 안 됐을까?
나는 요즘 그것을 복기하면서 지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게 고질적인 것인데, 퍼 주고 또 담아 주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에 가까운-‘무조건’이라고 썼다가 고침-집중과 도네이션(헌신)이
나를 망친다는 게
반복된 실패의 패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왜 그랬단 말인가.
우선, 착하게 태어났다. 이용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이건 지금에서야 극복이 되는 중이다.
그리고 첫째와 둘째가 합쳐져서 사람에게 잘해 주는 병이 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만난 사람은 얼마나 좋았더란 말인가.
바뀌어 되었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며 그 어느 중간에라도
주위에 사람의 울타리를 쳐 놓지 못한 나를 성찰해 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꼭, 끝나고 나서야
다 지난 다음이라야 보인다는 사실이
참 원망스럽지만, 확실히 그게 요새들 말하는 ‘패착‘의 중요한 일부다.
내가 만난 사람이란 내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나의 한계치가 곧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나마의 인연에 빠져 있는 동안에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 흔한 자기 계발조차 팽개쳤으니
내 삶의 질은 나락으로 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왜 똑같은 시간을 살면서
똑같은 학력과 대충 얼버무리가 가능한 조건을 다 갖고도 ‘에게!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
시간을 가져다 다 써 버리고, 나 자신 헐벗게 되었으면서 자기 관리는 사자가 풀 뜯어먹는 소리 취급을 해 버린 결과다.
그러니까 나를 돌아보면
늘 나보다 남이 우선이었고
양질의 ‘한 사람‘을 만나려 하기 전에
이미 주위에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실과 신의를 다 바쳤다.
나만의 신의칙을 혼자 준수하고 난리였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비하와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러라고 했지’’라는
그의 자만이 나에게는 모욕이 되는 부의 피드백이었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내 것을 퍼 주고 좋은 소리 들을 일이 없고
절대 남의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으며
너무 사람에게 잘해 주는 일이 자기 외로움 때문이라면 결과는 시간만 허투루 보낼 뿐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사람마저 떠나게 된다.
강하게는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내가 살 길이 되는
극한 상황이 와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다.
삶은 여전히 내 앞에 펼쳐진다.
아침에 눈을 떠서 침대 아래 두 발을 내릴 때의 나란
누구보다 소중하다.
그때 떠오른 일이, 그때 떠오른 사람이 나 자신과 가장 닮아 있다.
그리고 밤새 닫았던 블라인드를 방마다 돌아다니며
다시 올릴 때
오늘 삶이 새롭게 전개되리란 생각에
‘가급적’ 오늘은 무엇 무엇을 날 위해 해야겠다는 생각에 넘버링을 하면서, 가급적 아니 가속력을 낸다.
‘한 사람’을 저렇듯이 버린 듯 떠날 때마다
나 자신을 썰어서 또는 저며서 떼어 주었다.
소중한 내 시간마저 그렇게 잃어버렸다.
물건 하나하나씩은 얼마나 없어졌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야말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생의 중대한
경로를 바꾸는 일이다.
웃고 떠드는 일군의 사람들을
통창으로 된 식당 너머 거리에서 마주쳐 봤다.
내가 많은 시간 사람들에 파묻혀 지냈던 것이
스쳐 지나가며
내 특유의 크게 웃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을지도 모르는 삶을
너무나 많은 시간이 남은 사람처럼
늘 쉽게, 허투루 살아왔다.
요즘처럼 사람이 어이없이 죽는 사고/사건을 많이
접하는 때는 내 인생에 처음 같다.
늘 그랬듯이는 살지 말자고 되뇌었고
그랬더니 답이 내려졌다.
늘 그랬듯이 실패의 패턴을 무한 반복하지 말자고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복기하며
냉정을 찾았다.
실패 속에도 늘 그렸던 ‘그림’을 채우려고 한다.
다시 태운다면 차가운 머리에서부터 출발하고 싶다.
죽기 전에 말이다.
어느 날 준비하고 기다린 나를 그만큼 준비된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그때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알 것 같다.
‘이젠 되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차가운 돌이 되어 멈춰 섰지만
나의 한 일생 ’못다 한 열정’을
반드시 사람의 울타리에 싸여서 태워 살고자
오늘을 묵묵히
하루를 조용히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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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발행 예약을 누른 후 훌륭한 작가님의 또다른 통찰을 발견하여 링크를 하나 더 넣습니다~~)
국면이 달라지자 시중에 방송깨나 한다는 사람들 입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투자‘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참 격세지감마저 느껴지는 게, 그렇게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세상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금 나가서 주식을 사든지 뭘 사라고 강의를 하더니만
’ 말은 바꾸면 다 되는구나.’ 란 걸 실감했다.
그래, 투자의 원칙은 ‘잃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말 바꾸는 데에도 핑계는 있겠지.
사람을 잘 만날 수 있는 나를 만드는 것이
곧 자기 관리이며 시간 관리의 비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전거상에게 돈 만원을 건네며 ‘감사합니다 ‘라고 상투적으로 말한 저를 반성합니다.
저의 자전거 열정은 삶을 되찾는 중요한 원천이었으며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저에게 총체적인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말인데도
잘하겠습니다. 다시 가서 본때를 보여 준 다음
다른 미케닉을 만나서
알콩달콩 안장 높이, 페달 모양도 상의하고
저한테 맞는 케이던스 잘 맞춰서 신나게 탈 겁니다.
이래서 ‘만원‘은 늘 소중한 종잣돈인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