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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스틱 짙게 바르고 Oct 13. 2024

84. 오늘이 그 하루다.

- 내가 홀로서는 데 주어진 단 하루.



정타를 맞고 숨이 멎은 나



내일, 무슨 무슨 중요한 일이 잡혀 있을 때의 오늘.

사람들은 대개 어떤 기분과 감정이 되려고 할까.

바야흐로 튜닝의 시각이다.

1년 365일, 1달 30일에 비해

아주 작은, 짧은 시간만이 ‘튜닝’에 바쳐지곤 한다.


사실은 애를 먹고 있다.

주 5일 하루 8시간 근로 노동자로서

근로 소득을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고

나머지 시간에는 가족에 헌신하거나

헌신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틀 안에 넣었다.

릴레이션쉽(관계)이 생기면

두어달 안에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나누는 순환을

역시 챙기고 있다.

물론 관계의 밀도가 높다면 더 자주, 더욱 다양한

액티비티를 같이 하며 시간을 가져다 쓴다.


살고 남은 시간이 ‘노후’라고 생각했던

고속성장 시대가 끝나자

일하는 노후, 계속 ’더 움직여야 사는‘ 노후가 열렸다. 거기엔 경제적 자유라든지 아뭏든 경제 뉴스에 등장하는 몇몇 단어-예를 들어 ‘연금’, ‘보장’, ‘증여’, ‘세금’ 등이 밀접하다. 신경 쓸 게 무진장 많다.


그러니 언제 제대로 인생을

내게 맞춰 살 것인가.

시간이 쏜살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난 후

허탈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야

그런 대로 휩쓸리지나마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점검일이 단 하루, 일요일이고

내게 그 오전이 그런 시간이다.

“토요일도 쉬시잖아요?”

“네. 하지만 토요일은 달려 버립니다. 이렇게 멘탈이 자수정 같은 보랏빛이 되어

나 자신을 비춰 볼 수 있으려면

다 달리고 난 일요일 아침이어야 해요.“


만약 이 시간 누가 나를 불러내려고 하거나

반찬을 찾아 내라고 한다면 거절당할 테다.

마침 관공서가 모두 쉬니

과태료도 걷지 않아서 낼 것 없으니 좋네요.

쉬면 되는 일주일의 단 하루, 일요일,

그 중에도 오전 나절, 나는

쥐어짤 것이 거의 안 나오는 마른 수건 같이 되서


브런치 구독이 뜬 작가님들을 한 글 한 글 읽어 내린 후

나의 글을 한 자락 적기 시작한다.


참고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을 영접한 것도

브런치를 통해서였고

현재 정부의 탄생도 - 정치적으로 중립하는 직장에

다니는 관계로 - 탄생 다음날 밤에

홀로 눈 부릅뜨고 알아낸 걸 보면

브런치와 인터넷, 이 조합은

진정한 삶의 창구요, 정거장이 되어 주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머무는 곳, 더구나 갈 데 올 데 없는 마음이라면

글로써 달래지고

어느덧 차분히 일상으로 다가가게 하는

바다 같은 힘이 있다. 브런치에는.


내 글이 비록 지금은 그 님이 보시기에 ‘미쁘지’ 않지만- 왜냐하면 힘든 기억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나 쓰지 않았더라면 삭제되었을 기억을

써 내려오면서

이미 나는 살고 있었고

내게 일어난 일을 떠나고 있었다.


따돌림의 기억, 소중하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정중앙을 때렸기 때문에

안고 가야 했다. 안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힘든 중에도 힘들었던,

‘사람’



따돌려지면 제일 마음 아픈 것이

모든 호감과 배려로 점철됐던 릴레이션쉽이 파괴됐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나에게서 겉돈다.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눈에 띄지 않으려고

계단참이나 창고 후미진 데로 불러내거나

그나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말한다.


내게 씌여진 ‘주홍 글씨’는

번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서 이제 그와 내게는

건널 수 없는 굵은 ‘실선’이 그어진다.

나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눈치가 느린 사람조차 ‘큰 탈이 났다.’고 곧 알게 된다.

모두가 저 편으로 넘어갔거나

저 편이 하려고 하는 셋업을 완벽히 캐치했다.

나는 이제 입 다물고 어금니도 꽉 물어야 한다.

맷집이 좋아질 예정으로 되었으니까.


지금도 꿈을 꾸면 사람들이 나를 안에 넣어놓고 절대 작아지지 않는 큰 원을 그리면서 

강강술래를 한다.


내게는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그들끼리는

삼삼오오 알아듣고 서로 쳐다보고 웃어제낀다.

그 꿈에서 깨어난 날은 뒤숭숭하고 일에 진척이 없다.


내 마음이 갈 곳이 없던 날들 : 믿고 지낸 사람들이

뒤돌아서 자기들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귀엣말을 하던 

모습을 지켜 본 순간이 그런 날이었다.





모든 게 빠진 나의 ‘블랙 먼데이’



제일 힘들었던 월요일

월요일보다 더 힘들었던 나머지 요일들

있었던 그 때,


내가 아프다고 하면, ‘별로 아프지 않잖아?’라고 생각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얼굴 상태를 체크한 뒤

쯧쯧 하고 자기들끼리 돌아서서 또 수근댔다.


나도 내가 아픈 건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건지

확실치 않았다.

중심을 잡아야 했는데 사회생활의 원칙상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일을 한다는

그 두 가지가 아예 불가능했다.


나 혼자서 중심을 잡는다는 건 급기야

밥을 굶고 일을 놓아야 가능했다.

그건 ‘왕따’였고, 건강하지 않았고 배척으로 무장해제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한 현실에 다름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을 키우면서 누가 회초리를 들겠나.

아이들이 점점 귀해졌는데 누가 밥투정을 한다고

나무라며 “사흘만 굶기면 밥상 앞에 다가앉는다.”

재래식 훈육이 가당하겠나.


하지만, 급기야 내가, 굶는 데는 장사가 없고

모든 게 ‘밥심’임을 생각하게 됐는데

언제부터냐 하면 바로 따돌림 이후였다.


먹지 못하고 비틀거린 시간들.

상심이 컸지만 알아 주는 이를 바랄 수 없던

그 때로 언제든 다시 소환되지 않으려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발바닥으로 버틴

올 한 해가 어느덧 사사분기로 접어 들었다.





아프면 소외되서요

아픈 걸 숨겨야 해요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나는 활만 갖고 있는 몸이다.

한 번 선택이 이루어지면

“네가 쐈지?”라고 할 때 말없이 고개만 까딱여야 한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사랑스럽지도 않았고

그 때마다 현명했던 나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증거’를 대라고 하고

“나는 ‘증인’이 되지 않겠소.”라고 거부한다.


좋은일은 같이 나누지만

안좋은 일은 극복하고 오라고 말하는 사회.

타이틀이 사람을 가르고

성공한 사람과의 악수에 사람이 몰리곤 하며

자산으로 친구가 나뉘는 자본주의가 만연한 세상.


내가 보기에 여기서 아픈 사람은 최약자다.


게다가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 다쳤다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신체 기관이 손상되고

암 세포로, 전이로 파괴된 세포로 덮인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입증하는 수순이나마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신경계와 ‘허오르몬(호르몬)’, 면역계

이야기는 “왜 출근을 안 했어?”라는 댓글만 달린다.


그렇다고 ‘너보다 아픈 사람 세상에 많아.‘라고 하는

마음보가 제일 힘든 일도 아니다.


교사가 학생을 상담하지 않고

민원인을 상대로 전화 면담을 실시하지 않고

의사가 환자를 상대로 문진을 하지 않고

징후나 증상 발현 횟수나 간격만 물어

처방을 내려도(“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란 말이야!“라고 호통을 쳐도 그 의원은 환자가 바글바글하다.),


의사가 그 병원을 처음 개원할 때의 간절함을 잊어버려도

교사가 처음 임용되었을 때의 떨림을 떨구고 살아가도

공무원이 자기 손에 달린 사람들의 인권이 아니라

자기 월급만 방어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연속해서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지 않고 돌아가는 한,

톱니바퀴처럼 결합되어 맞물린 힘에 의해

동력이 끊이지 않는 지속성을 자랑하는 한


약자가 설 곳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할 시간은 대부분 짧다.


나는 내일이 월요일이고

나에 대한 무수한 ‘소문’에 의해 나 자신도 알아내지

못한 ‘내가 아팠던 이유‘가 분명 있었지만

가차 없이 “증거 없음.”으로 부인할 그 분은

정작은 딴 데를 보고 있다.


숨을 고르고 정신을 고스란히 뽑아내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밥을 먹어야 하고

생의 의지를 꺾이지 않아야 하는 나는

자수정이 보라색으로 빛나듯

광택이 나게, 맑게 정신을 간추린 후

오는 밤 다시

내게 오는 한 주간을 끌어당겨야겠다.


공간은 정신을 잡았다 풀어 주었다 한다. 혼자 있는 공간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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