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24년 2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려 왔다.
‘내가 여기서 이런 말을 했구나’, 다시 읽어보면
그런다.
사실은 퇴고가 많이 부족했다.
전문 작가도 아니었을 뿐더러
하루의 일상을 다 소화하고 영혼이 많이 털려서
어떤 날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고서
간신히 발행하기도 했다.
그간 내가 쓴 글은
일을 바라본 관점과
사람을 사랑한 시점이 녹아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없는 소설가적 글쓰기를 했다.
첫째는 여타 SNS를 흘끔흘끔 보는 현대인이지만
‘공무원'이라는 신분의 여러 제약을 의식하며 썼다.
둘째는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내 마음을 이토록 잘 알게’ 되리라는
결과? 성과?를 사전에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어 주신 분들이 소중하고, 더욱 감사하는 이유다.
오늘도,
내가 혼자 차 안에서
길거리를 무심코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멍 때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시간 홀연히 나를 스치는 생각,
그것이 아마 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 '사랑'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사 중에 "Z세대는 다른 사람을 관리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다 프로젝트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집중시키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한다."라는 대목에
마음을 뺏긴다.
또한 ‘중간 관리자'라는 호칭이 나오는데
나는 발행한 앞선 글들에서
계속해서 목이 터져라 외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시험 하나로 사람을 뽑아 놓고 그다음엔 어떻게 일을 돌리란 말인가?'였다.
마침 내 손에 들린 책은 '일본 전산 이야기'(김성호 저, 2009)라는 빨간 표지의 책이다.
나는 읽는다.
‘목소리 크고, 밥 빨리 먹는 사람'을 진짜로 뽑아서
인재로 키운 일본전산 나가모리 사장의 경영 수칙을.
나날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대체했고
인간을 대체했다.
시간과 속도가 아예 달라졌는데
‘조직 전체를 휘감은 열정'(위 책, 205쪽)이 아니라
나야 중간 관리자까지도 이르지 못했지만
‘일은 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던 시절이
십 년간 있었다.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대혼란의 따돌림 속에 나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하여
나는 '패자의 문화'(위 책, 256쪽)를 만끽할 처지로,
나도 한번 만나 보았었더라면 좋았을 거다.
'저 사람을 따라가면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위 책, 135쪽)은 나의 관리자를.
https://brunch.co.kr/@innin/134
https://brunch.co.kr/@heymich/36
이번 주에 재미있게 읽은
‘오린이‘ 포도송이님과 ’공장 언니‘ 김로운님의 글에서 비쳐진 것은
내가 내 시간을 온전히 관리할 때의 행복감,
뿌듯한 마음이랄 수 있다.
내게도 '다른 사람을 관리하는 데 들였던 시간'들이
온전히 내 것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다.
일에서나 사랑에서나. 반강제적으로,
모든 것은 '불측의' 손해를 가져 왔다.
나는 이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손해다.
그것은 그러나 '불측의' 것인가?
즉 까마득하게 몰랐더란 말인가?
누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할 것인가.
물론 나도 아니다.
분간하기가 너무 어렵다.
나는 '언더독'님의 투자 이야기를 즐겨 읽는다.
https://brunch.co.kr/@d359e7dda16349d/811
어떤 투자를 어떻게 하시는지 상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따라 가면 굶어 죽지 않게 할' 노하우를
많이 갖고 계실 것 같다고 글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이 작가님의 힘이 넘치는 글을 읽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반면에, 포스팃을 얌전히 붙여서 인덱스를 하고
그것을 말끔하게 바인딩해서
정부화일 꿀팁으로 블로그에 올려도
조회수가 나오겠다 싶게 만들어서 가져 온
그 당시의 한창 젊은 나이인 ‘도전자'를 보면서
저게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저렇게 일해 놓으면 우리 기관에서 엄지척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표정인데?
그걸로 나를 이길 거라고?
나는 옜다 말했다.
“정 사원은 이런 걸 잘 하는구나."라고.
말이 필요 없었다. 마분지에 송곳으로 줄 긋고 각 잡고 양면 테이프 붙이고 철끈 안 보이게 마무리하는
편철 작업은 일년에 한 두번이다.
그것은 최종 결과물이거나 종이 문서로 남겨야 하는 불가피한 업무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거기엔 말이 필요 없다.
자신의 특정 스킬을 부각하는 것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면접을 무사히 통과하는 '선발'에선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특기를 자랑하는 모습은 나쁘다고까진 않겠지만, 사실은
‘말'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기술'과 그것을
개발한 노하우를 주고받는 것이 업무 추진의 핵이었다.
따라서
몇몇 가지에서 유능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기관은 그들의 유능함을 입증키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망가진 레고 비행기나 레고 자동차가
비행기도 자동차도 아니듯이
사람도, 일도 망가지면
아무 형체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딱 십년 만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점에 한 달만 더 매달렸으면
나는 어디선가 죽어 있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이야기가 늘 어떤 패턴이었을까?
뜨겁게 사랑하고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판단될때까지
격정적으로 사랑하고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졌다.
일도 사랑도 그렇게 했다.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남았을 테이다.
하지만
보스가 보스 같지 않아서
‘어쩌다 보스’였던 데다
-모든 일은 우연이랄 수 있겠지-,
설상가상 자꾸 말을 바꿔서
‘언보스’는 난 모르겠고
내가 보스를 ‘디스’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변을 바꾸지 않고
나를 일순위에 두지 않으면서
그게 이기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을
나 또한 뜨겁게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도 형벌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차피 십 년 전 아니라 일 년, 한 달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에서
뜨겁게 사랑하고 격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일은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의 ‘멋짐‘은
그 둘의 공유이다. 자기가 잘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있음으로써 그가 살았다.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이제야 마음 속 고통을 걷어내고
맑은 정신이 찾아왔다.
끝까지 기다려 줬지만 안 된다면
기다림에서 풀린 나는 돌아간다. 나 자신에게로.
나는 확인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