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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an 25. 2024

설거지를 팽개치고는

바퀴벌레와 왼손 사용기

게으른 엄마가 딸에게 한 마디 듣는다.

"나 혼자 집에 있을 때보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 더 어지럽혀지는 것 같아."

싱크대만 봐도 맞는 말이다. 나는 하루에 한 끼 먹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다른 끼니때까지 내가 설거지를 하는 건, 억울하거나 불만인 건 아니지만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모아서 하는 맛이 또 있다는 핑계를 둔다.


얼마 전 생긴 사건으로 인해 말 그대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생겼다. 억울함과 불만, 배신감과 분노로 참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나에게 왜 그랬던 것인지 따져 묻거나 공식 사과를 하라, 억지라도 부려볼 요량이었다. 그나마도 어느 정도 마음과 몸이 추슬러지고 난 후의 생각이었다. 마치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작정 떼를 쓰며 드러눕는 아이들처럼 나도 그 앞에서 뻗대고 누워 시위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치는 순간에 알았다. 단 1초라도 함께 있기 어렵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려주었다. 그와 마주치자 내 발이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고 있었다. 익숙하고 넓은 공식적인 공간에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멀쩡했다는 것이 또한 씁쓸했다.



그즈음 치매를 다룬 영화를 게 되었다. 최근의 일부터 잊히고, 무엇보다 좋지 않은 기억이 남는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아닌데 새삼 겁이 났다. 내가 만약 당장 치매에 걸린다면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춘 그 일과 사람만은 남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속 어떤 알맹인가가 꺼내어지고 산산이 부서지게 한 일과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동안 몸서리치고 미친 듯 울부짖게 한 것으로 부족하여 내 머릿속에 더 오래 남게 된다는 말인가! 바퀴벌레나 삼엽충처럼 보기 좋은 모양새도 아니면서 끈질기게 살아남거나 화석이 된다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치매만은 걸리지 않아야 다.

예술혼을 참아내면 누구나 화가

그래서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을 최대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마우스도 왼쪽에 놓고 물건을 집을 때도 왼손을 내밀어 들어 올렸다. 딸의 한 마디가 아니라도 설거지를 하려 했었다. 습관처럼 오른손에 수세미를 들고 왼손으로 세제병을 눌러 쓱쓱 닦다가 치매 예방을 떠올리고 각성했다. 얼른 수세미를 왼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내 행동을 인지해보니 우스웠다. 왼손은 그저 수세미를 들고만 있을 뿐 오른손을 움직여가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오른손으로 설거지했을 때는 오른손의 수세미가 움직여 냄비 안을 닦고 프라이팬 바닥을 비볐었다. 그때 왼손은 거들기만 했는데 반대가 되고서도 왼손은 또 거들고만 있었다.

습관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치매 예방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대책이 필요하다. 딴생각이 날 때 마음을 오랜 시간 앗아가 줄 취미활동이 필요하다. 하다가 멈춘 성인용 유화그림 세트라도 꺼내야겠다. 어차피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성을 너무 불태우면 오히려 망작이 나오니까 왼손으로 완성해 봐야겠다. 오늘도 건강한 내 마음으로 살기 위해 설거지를 팽개치고는 딴짓을 해본다. 반드시 딴짓을 할 것이다. 아이쿠, 이런 깊은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딸에게 또 한 소리 듣겠군. 하하하, 딸아! 지못미!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저는 누구보다 세종대왕님과 한글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초등학생들과 살다 보니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그들과 함께 살 수 없었음을 밝힙니다. 일부 사용함으로써 그 시기에 이해하기 쉽거나 읽는 대상이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는 범위에서 사용하려 합니다.   


#치매 #예술 #그림 #설거지 #영화 #바퀴벌레 #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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