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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짱 Jun 19. 2024

황제 헬스

[소소해도 행복한 걸 어떡해?]

십 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친구처럼 함께 지내고 있는 성인병 때문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다. 의사는 혈액 검사 결과를 보며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내 건강 상태에 대해 잠시 고민하더니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매일 운동을 해보자고 권했다. 평소 운동을 지극히도 싫어하는 내게, 운동이라고는 숨쉬기와 밥 먹기가 전부인 내게, 대학교 1학년 때 체육 시간에 실시했던 농구 시험에서 “너처럼 농구하는 놈은 생전 처음 본다.”라며 교수님께 핀잔을 들었던 내게, 의사는 운동을, 그것도 매일 해보라는 처방을 내린 것이었다. 병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늙어 죽기 싫으면 의사 말처럼 매일 운동하라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헬스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그렇게 헬스를 시작한 지가 벌써 십 년이다.


매년 여름이 다가오는 시즌이면 헬스클럽은 멋들어진 몸을 만들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아령부터 시작해 벤치 프레스, 런닝머신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운동 기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헬스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사람들의 가쁜 숨으로 탁하기만 했던 공기가 가슴을 맑게 파고들었고, 쿵쾅거리던 운동 기구의 소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으며, 땀 흘리며 씩씩거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리를 차지하느라 눈치 싸움이 치열했던 운동 기구들이 오늘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낯선 고요함이 어색하기만 했다.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각각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운동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로움에 내 마음도 함께 느슨해졌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구들, 빈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 이 모든 것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태연하게 운동 기구를 하나하나 사용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런닝머신 위를 느릿느릿 걸으며, 헬스클럽의 창문 너머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야경이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이 헬스클럽의 황제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땀방울이 흐르는 얼굴을 닦으며, 오늘의 헬스가 주는 즐거운 감정을 음미했다. 바쁜 도시인들의 일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평화가 오늘만큼은 가슴 속에 가득 찼다. 깔끔한 바닥, 잘 정돈된 기구, 경쾌하고 힘찬 음악 소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오늘만큼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로 마음 편하게 여유로운 운동을 했다. 차례대로 운동 기구를 사용하며 몸의 각 부분을 골고루 단련했다. 헬스클럽이 한산하니 트레이너들도 더 여유로워 보였다. 몇몇 트레이너들은 가볍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저 바쁘게 지나치기만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더 따뜻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 동안, 나는 오늘의 특별한 경험을 떠올렸다. 매일 몸 좋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 차지 싸움에서 밀렸었던 내가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던 오늘, 이 시간은 나에게 주어진 작은 선물이었다. 때로는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삶에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헬스클럽을 나서며, 오늘 하루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황제 헬스를 하면서 느꼈던 소소한 행복을 가슴에 담는다. 매일이 오늘처럼 특별할 수는 없겠지만, 헬스클럽의 한적함 속에서 누렸던 그 특별한 시간이 오늘의 마무리를 행복으로 채워주었다. 그러나저러나,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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