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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Feb 07. 2024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남은 색이 잿빛입니다

항소심을 끝내고 어제 잤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모자라고 보았습니다.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내 그림은 코끼리를 삼키고서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뱀을 그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어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보아 뱀의 속이 보이도록 다시 그림을 그렸다.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설명이 필요한 어른입니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의 입을 빌려 한 말인 것을 모르는 어른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어린이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어른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른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어린이의 쉬운 설명이 필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아이를 가르치려고 달려드는 어른이 먼저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어린 왕자』가 초등학생을 위한 어린이 동화책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이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어른이 어린이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 것과, 어린이의 말로 어른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의 차이를 찾으려다 그만두었습니다.


교육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하는 일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을 가르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어린이의) 설명이 필요" 한 일들이 많습니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걷던 젊은 엄마를 보았습니다.

길을 가다 아이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습니다. 

그때 아이의 엄마가 자리에 앉아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의 눈높이에 엄마의 눈높이를 맞추려 한 것입니다. 

그날의 젊은 엄마의 모습이 지금껏 잊히지 않습니다.


어른이 어린이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 간음하지 말라 …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가 담긴 <십계명>을 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린 왕자』를 어린이 필독도서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서로의 눈높이만 다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서로가 다른 것을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르게 본’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겉(모자)만 보고 속(코끼리)을 보지 못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어린양을 그려줄 수 없으면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속에 있어”라고 상자를 그려주는 지혜가 소중합니다. 

나의 주장이 아니라, 너의 이해를 너의 상상에 맡기는 일입니다.


본 것을 보았다고 해서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자를, 아니 모자라고 여겼던 것을 본 사람은 모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본 사람은 모자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겁니다. 



담배 파이프 그림 아래에 르네 마그리트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파이프에 담배를 담을 수 없는 이미지에 ‘이것은 파이프야’라고 썼다면 나는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고 합니다.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자신의 고백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면, 흔히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라고 합니다. 

사회가 오래도록 참과 거짓으로만 보게끔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둘로 나누면 싸움입니다. 

싸우려고 둘로 나누는 게 맞습니다. 

내 편과 네 편입니다. 

여(與)와 야(野), 보수(保守)와 진보(進步), 좌(左)와 우(右)를 선(善)과 악(惡) 둘로 나누면 싸움은 그치지 않습니다. 


나누는 것은 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의 눈을 갖고 있지 못하는 연유입니다.


색(色)이 흑(黑)과 백(白)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으면 회색(灰色)이라 불립니다. 

잿빛은 맑음이 아니라 흐림입니다. 

음산과 암울로 덧칠된 색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남은 색이 잿빛이라는 것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잿빛 하늘을 좋아합니다. 

곧이어 내릴 비를 예고하는 하늘빛입니다. 

비를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비를 그을 처마를 머리 위에 두지 않은 나그네의 길을 드리운 하늘빛입니다. 

흑백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색이 잿빛입니다. 





‘말’을 뜻하는 한자어 언(言)을 보면 위로부터 둘을 뜻하는 二 가 두 개 있습니다. 

그 아래 입 (口)이 있습니다. 

‘두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서 입을 여는 게 말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시(詩)는 두 번을 생각하고 입을 연 말(言)을 절(寺)에서 하는 모양새입니다. 

알 듯 모를 듯 다하지 않는 말이 시(詩)라고 하면, 절에서 듣게 되는 독경(讀經)과 닮아 보입니다. 

그러니 선시(禪詩)는 풀어줘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말합니다.

시인은 시어(詩語)로 말한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돌덩어리 안에 있는 다비드와 모세를 발견하고 돌들을 깎아내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언어를 조탁(彫琢)하는 사람입니다.




서양에 장자크 루소가 있다면, 동양엔 도연명(陶淵明)이 있습니다. 

한시(漢詩)의 전원문학(田園文學)을 개척했다고 합니다.


‘보다’는 뜻으로 도연명은 견(見)을 시어(詩語)로 썼다고 합니다. 

간(看)은 그냥 보는 행위, 시(視)는 응시하는, 관(觀)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는, 람(覽)은 둘러보는, 목(目)은 단순한 눈길, 규(窺)는 몰래 보는, 도(睹)는 보고 상황을 알아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자를 다 알지 못하고 모국어로 쓰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이 모두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도연명이 많은 글자 중에서 왜 견(見)을 그의 시어(詩語)로 삼았는지를 살피면 이해보다 감동이 앞섭니다.     


견(見)은 발음과 뜻에 ‘나타날/드러날’ 현(現)을 담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지체 높은 이를 찾아가 나를 보이는 것을 ‘알현’(謁見)이라고 합니다. 

‘보다’ 견(見)이란 어떤 사물이 그냥 눈앞에 나타나거나 드러나는 것입니다. 

견(見)은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물이 서로 같은 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면 사물이 보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사물도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물에 나타나고 사물 또한 내 앞에 그냥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물이 서로 보려고 하는(爲) 것이 아닙니다. 

순간 문득 펼쳐진 눈앞의 정경(情景)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견(見)입니다. 

시어(詩語)로서의 견(見)의 요체는 깨달음, 오묘한 깨달음(妙悟)이라고 한답니다.     



노장(老莊)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사상을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라고 합니다.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면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무언가 ‘하려는’(爲) 인간의 의지에 대한 부정입니다.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自然)에 거스르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부정입니다. 

‘하려는’ 위(爲)에 인간(人)을 붙이면 '거짓' 위(僞)가 됩니다. 

인위(人爲)와 작위(作爲)를 부정하는 것이 자연(自然)의 무위(無爲)입니다.


간(看), 시(視), 관(觀), 람(覽), 목(目), 규(窺), 도(睹)가 위(爲)라면,

견(見)이 무위(無爲)라는 풀이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름과 싸움은 인위와 작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흑(黑)과 백(白)이 위(爲)라면,
모든 주장과 선동, 나눔과 싸움을 불태우고 남은
잿빛은 무위(無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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