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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Feb 14. 2024

지워야 할 세 글자

탐진치(貪,嗔,癡)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위층에 누가 사는지를 알면 소음이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로를 알지 못하면 이해와 배려를 알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파트는 담장이 없는 주택입니다.

가깝게 사는 게 아니라 아예 달라붙어서 사는 주민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민 간 소통은 멀고 소음은 가깝습니다.

앞 동에 사는 이가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이지만 가까이 사는 이웃인지는 쉽게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아파트는 마을이 아니라 단지라고 따로 부르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이웃집 저녁 밥상에 오른 것을 안다고 합니다.     



감옥은 튼튼하게 지어졌나 봅니다.

위층 소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내 머리 위에 누가 사는지를 잘 알아서 이해와 배려가 귀를 닫아서는 아닙니다.

위층뿐 아니라 옆 방에 누가 사는지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윗방이라고 내방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종일 앉아 있는 좁은 방에서 쿵쾅거릴 일이 없으니 층간 소음이 있을 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감옥에서 윗방과 옆방의 사람을 이웃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물리적 거리만으로 이웃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지역에 산다고 주민도 아닙니다.

새로 지은 교도소가 얼핏 아파트처럼 보인다 해도 누구도 주택단지로 보는 이는 없습니다.

동과 동뿐 아니라 아예 방과 방 사이의 교류와 접촉이 차단된 집단 수용소여서 그렇습니다.


감옥에서 주민과 이웃은 없지만, 식구는 있습니다.

방 하나에서 종일 함께 먹고 자는 이들입니다.

식구가 아닌 다른 방 재소자를 매일 보게 되는 유일한 수인(囚人)은 사소라고도 부르는 사동 도우미입니다. 사동 내에서 배식 및 각종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하는 기결수입니다.

일제 용어가 아직도 남아서 소지라고도 부릅니다.




얼마 전 우리 사동 사소가 새로 왔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썼는데 알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짧게 밀은 머리에는 허연 구멍이 나 있습니다.

앞니 두 개가 빠져 있어 혹 웃음이라도 터져 나올지 몰라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방을 나와 사동 복도를 오고 가지만 철문을 나가지 못하는 그도 수용자입니다.

사동 담당 교도관이 그를 Y(성경인물)라고 부릅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언제 밖으로 나갈지도 모릅니다.

아니 나는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먼저 있어서 일 겁니다.


Y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이 없습니다.

말도 없이 끼니마다 배식통을 작은 방의 구멍으로 밀어 넣습니다.

방마다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다그치는 말에 아무 대꾸는 들리지 않습니다.

Y를 건방지다고 소리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들입니다.

한두 주만 지나면 Y에게 익숙해집니다.



내가 있는 방에서 층간 소음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다른 소리가 새벽마다 있습니다.

방 하나 건너에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방 철문을 두드리는, 아니 차는 소리입니다.

목소리는 없고 발로 차는 쿵쿵 소리입니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됐나 봅니다.


독방입니다.

누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차는 이와 제지하지 않는/못하는 사정도 알지 못합니다.

서로가 이유 없는 게 없지는 않을 겁니다.

아침 운동시간마다 그 방을 지나갑니다.

악취가 진동합니다.


오늘 아침 운동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그 방이 열려 있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가 코를 막고 얼굴을 돌려서 한 마디씩 욕을 하며 지나갑니다.

얼핏 안을 훔치듯 보았습니다.

Y가 있습니다.

방을 찼을 사람은 어둠 속에 살짝 등만 보였습니다.

Y가 방을 닦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Y가 방을 따고 들어갔을 일은 없을 겁니다. 시켜서 하는 일일 테지만 거부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Y가 나선 일임이 분명합니다.

징역에서 자기(自)의 이유(由)를 찾아 말없이 자기 일을 하는 Y입니다.     



엊그제 Y가 신문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불교신문입니다.

재소자들은 자유로 일간신문을 자비로 구독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구독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온 신문도 읽지 않습니다. 부정기적으로 오는 종교신문 뭉치들을 사소가 옆구리에 끼고 방마다 돌아다닙니다.


지난달 Y가 볼 사람 있느냐는 듯 배식구로 밀어 넣었을 때 내가 불교신문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Y는 불교신문이 들어올 때마다 나에게 가져다줍니다. 말이 없는 것은 매번입니다.

나를 불자(佛者)로 아나 봅니다.


불교신문을 잡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처음 대하는 것은 언제나 읽을거리가 많습니다.

배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깊이를 알지 못해 감히 다이빙하듯 머리부터 처박지는 못합니다.


이미 알고 있을 독자들을 대하는 말투들이 많습니다. 불교의 전문용어들은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暗號) 같습니다.



고난 없는 삶이 없습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닥치는 고통이 일반입니다.

괴롭고 아프지 않은 고통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고통이 지옥이라면

견디는 날들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생이 나서(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고(苦)인 것을 본 것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생로병사가 궁금해서 불교신문을 뒤적이는 것은 아닙니다.

늘 같은 게 여기서의 일상이라면, 매일의 반복을 지우려는 일이 내가 할 수 밌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반복을 지우는 일은 새것을 만나(드)는 일입니다.

문을 열어주면 낯선 이가 손님이 됩니다.

처음에 손을 대는/내미는 데에는 호기의 기대보다 의지의 용기입니다.


그동안 쌓인 불교신문에서 찾은 것들입니다.

내가 찾고 싶은 것에서 찾아졌는지 모릅니다.




고통은 번뇌(煩惱)가 만든 것이라고 니다.

번뇌를 지우는 일이 고(苦)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밖에서 들이닥친 고난이기보다는 오히려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드는가 봅니다.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가, 탐욕(貪慾), 진에(嗔恚) 그리고 우치(愚癡)라고 한다네요.

줄여서 탐.진.치(貪,嗔,癡)라고 하고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탐(貪)욕은 지금(今), 재물(貝) 위에 앉아 있는/있으려는 모습일 테니 쉽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재물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나쁠 것 없다고 살았지요.

마음이 편한 날이 없던 것을 압니다.


탐욕은 너의 것을 나의 것으로 가지려는 모습입니다.

탐욕은 나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너의 것을 가진 후에라도 나의 것을 보지 않으면 탐욕은 그치지 않을 겁니다.

나를 돌아본다 해도 만족이 그칠지는 모릅니다.

탐욕은 나를 보는 것으로만 멈추지는 않아 보입니다.


나에게 채울 일을 없애는 일만이 탐욕의 끝이 아니라, 아예 그 시작이 일어나는 것을 지우는 일 같습니다.


나를 비우는 일을 정하지 않고서 고(苦)를 벗어날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뒤에 둘(진嗔, 치癡)이 무엇일지 몰라 한자(漢字)만 들여다볼 뿐입니다.

옆에 가르쳐 줄 이를 두지 않아서 혼자서 깨치는 일이 어렵습니다.

깨쳤다 한들 맞는지도 모릅니다.

수인(囚人)은 네이버와 구글을 손에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치(愚癡), 어리석음이 번뇌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어리석다’는 치(癡) 자(字)는 痴 라고도 씁니다. ‘아는 게’(知) 병상에 누운(疒) 모습입니다.

‘아는 게 병’인 모습 같습니다.


남은 모르고 혼자만 알고 있어서, 남을 가르치고 싶은 답답함에 괴로움이 있어서는 아닐 듯합니다.

'나만 안다'는 생각이 혼자만의 비밀을 숨겨두어 '아는 게 병'인 것도 아닐 겁니다.


'나만 안다'는 생각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나만 안다'는 생각은 '나'가 아니라 '너'가 어리석다고 단정할 때입니다.

어리석음(愚)이 번뇌를 가져다준다면 '나'가 아닌 '너'가 되어야 한다고 지내왔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리석음은 '나만 안다'라고 여길 때라고 가르칩니다.

'나만 안다'가 왜 번뇌의 근원이 될지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나의 괴로움이 보였습니다.

내가 '어리석다'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나만 안다'가 나에게 번뇌가 되는 것을 천천히 알게 됩니다.


안다고 떠드는 게 자해(自害)를 자초(自招)하는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라고 혼자 우겨봅니다.

번뇌를 지우는 치유는 아는 자의 침묵에 무게를 두는 모습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참(眞)을 찾아가는 묵상과 어리석음을 깨치려는 묵언수행인가 봅니다.


번뇌는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안다고 하는 데에서 오는가 봅니다.

번뇌는 혼자로 그치지 않고 서로의 싸움으로 번집니다.

서로 자기가 ‘안다’라고 우기는 데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매번 불교신문을 챙겨주는 Y에게 과자 한 봉지를 건넸습니다.

여전히 말없이 작은 미소만 보여주고 갔습니다.

Y에게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는 가섭(迦葉) 존자(尊者)를 보는 듯합니다.  




두 번째 글자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성낼’ 진(嗔) 자(字)입니다.

화내는 것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임을 연결하는 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자를 혼자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眞)을 ‘입’(口)에 담는 게 ‘화’(嗔)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니 기막힌 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가장 크게 성내는 일입니다.


‘참’(眞)은 그 무엇에도 뒤질 수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이어서 악을 써서라도 외쳐야 합니다.

'화'(嗔)는 자신이 ‘참’(眞)이라고 ‘입’(口)을 다물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진(嗔)을 진(瞋)으로 쓰기도 합니다.

‘입’(口) 대신에 ‘눈’(目)으로 보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나, 자기 눈으로 본 것이나 서로 다를 게 없습니다.



지난날들의 내 모습을 본듯합니다.

진보의 선봉에 서서 나의 ‘참’(眞)만을 외쳤던 내 모습이 한 번도 ‘화’(嗔)를 내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지금(今), 재물(貝)에 눈독을 들일 일이 없으니, ‘탐욕’은 나의 번뇌가 아닐 듯합니다.

있다면 없어진 재물(貝)을 끄집어내는 기억입니다.


감옥에서 아는 체를 할 일이 없습니다.

죄수 아닌 재소자가 없습니다.

어리석다고 지정할 '너'를 이웃으로 두고 있지 못합니다.

말도 없으니 우치(愚癡)의 번뇌는 내 일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내가 ‘참’(眞)이라고 외칠 수 있는 ‘화’(嗔)는 나에게 내어줄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감옥에서는 탐진치(貪,嗔,癡)를 드러낼 일이 없어 보입니다.


감옥은 탐진치(貪,嗔,癡)를 지워낼 수 있는 수인(囚人) 수도처(修道處)로 삼을 곳입니다.


감방(監房)이 선방(禪房)이 될 수있어 보입니다.



감옥은 위기(危機)의 수인(囚人)이 수인(修人)이 되어 가는 기회(機會) 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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