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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Feb 21. 2024

독법(讀法)

투창과 비수

금(金)이 돌(石) 보다 비싼 것은 당연히 그 수가 적어서입니다.

어디서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희귀성 때문입니다.

많으면 그 소중함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중한 삶을 사는 길은 아주 간단해 보입니다.

가진 것들을 덜어내고 덜어내는 일입니다.

가진 게 적으면 적을수록 그 가치의 소중함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기는 쉬운데 실행에 옮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십원의 가치를 알기 위해 만원을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원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만원을 쉽게 쓰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만원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십원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되어봐야 알 뿐입니다.



감옥으로 들어온 날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린 날이었습니다.

적은 것의 소중한 가치를 알기 위해 스스로 가진 것을 모두 덜어낸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감옥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아니 가질 수도 없는 곳입니다.

누구나 감옥에 들어올 수는 있지만, 아무나 들어오는 곳은 아닙니다.

감옥은 그 어느 거주지보다 희귀성을 갖습니다.

그렇다고 감옥이 소중하고 귀해서 이곳을 금광(金鑛)으로 여기고 부러 찾아오는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와 빈 손이 되어서야 비로소 작은 것 하나 손에 쥐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되어봐야 알 뿐입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고려말 명장 최영 장군의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돌을 금으로 여기는 이는 정상이 아닙니다.

금을 돌처럼 여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이도 없을 겁니다. 

"같이 하라"는 말이지,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일은 없습니다.

글자대로 읽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해석에 자기 의미를 둔다면,

황금이 없는 나로서는 황금을 돌로 보기보다는, 돌을 황금으로 보려는 마음의 눈이 더 절실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게 없는/을 것들에 헛된 꿈을 꾸기보다는,

내 옆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마음입니다.


금도 없이 돌벽에 갇히니 금도 돌도 옥(獄) 담 밖의 것들일 뿐입니다.

금도 돌도 내 것이 아니면, 그도 저도 내 걱정이 아니게 됩니다.




세상사 모든 게 ‘먹고사는 일’입니다.

즐거운 날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땀 흘려 일해야 하는 고역(苦役)이라고 합니다.


감옥에서는 ‘먹고사는 일’을 걱정할 고역이 없습니다.

먹는 것조차 제 손으로 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가 아닙니다.

내가 먹고살 일을 구할 선택이란 아예 가능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나의 시간이란 사방으로 막혀 있습니다.

내가 구해서 먹지 않습니다. 먹여집니다.


감옥은 사회와의 격리입니다.

고역의 사회로부터 떨어져 있다 해서 휴양처가 아닌 것은 물론입니다.

지난 모든 것들과의 차단입니다.

고역조차 할 수 있지 못합니다.

먹고 살 고역을 택할 자유마저 소중한 것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되어봐야 알 뿐입니다.


‘먹고사는 일’의 바쁨과 걱정에서 벗어났다고 고역(苦役)에서 벗어난 쉼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옥담 안이 아니라, 옥담 밖의 가족에 대한 걱정만이
안에서 치러야 하는 옥고(獄苦)입니다.


가진 게 없고, 가질 게 없는 처지가 되면 빈손만을 쳐다보게 됩니다.

‘그’ 시간 동안엔 ‘그’ 허탈함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손을 뻗게 되는 것은 가지려고 보는 눈이 있어서입니다.

가질 게 없으니 손에 잡히는 게 있을 리 없습니다.

휘저을 뿐입니다.

손 쓸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릴없게 됩니다.


자연스레 눈을 감게 됩니다.

눈을 감으면 손이 차분히 내려앉습니다.

그것이 마음가짐의 모습입니다.

좌선(坐禪)의 자세입니다.

사방이 벽인 감옥은 면벽(面壁)할 최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시 읽는 책에는 이전에 적어 놓은 나의 글이 있어서입니다.

내가 쓴 글이지만 다시 볼 때는 내가 내 글에 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그어 놓은 밑줄을 다시 보아도 다시 새로운 느낌으로 읽게 됩니다.

지우거나 고쳐 쓰지는 않지만, 덧붙이는 경우는 있습니다.

시차를 둔 생각을 위해 덧붙일 때는 색을 달리해서 적어 놓습니다.



선생님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마쳤습니다.

<강의>는 끝났지만 이제 <나의 동양고전 독서> 숙제는 쌓여 있습니다.

이제 나 스스로 동양 고전들을 하나씩, 다시 그리고 끝까지 읽어가려고 합니다.

나름 순서를 짜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강의> 목차 순은 아닙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시작과 끝만 우선 정했습니다.

이미 읽은 노자 도덕경을 첫 순서에 넣었습니다.


출소 전 주역의 마지막 궤를 읽는 게 <나의 동양고전 독서>의 순서입니다.


책을 다 읽으면 첫 페이지에 나의 독서 감상을 적는 일을 이번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들어오자
매일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의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를 썼다.
그의 사색(思索)을 따랐다.
그의 출소 후의 독보(獨步)를 따랐다.
그의 <강의>를 읽었다.
그의 사색과 독보가 걸었던 그만의 독법(讀法)을 따랐다.
나의 감옥에서의 사색은 묵언의 따라감이다.
그는 '고전 독서는 과거 역사의 재조명'이라 했다.
나의 고전 독서는 나의 성찰을 위한 현대사다.
그를 뒤따라가는 길에서 나는 나의 사색에 각성과 성찰을 따랐다.


선생님은 마지막 시간(페이지)에 청강생(독자)들에게, “시(詩)와 산문(散文)을 더 많이 읽으라”는 말씀으로 강의를 마칩니다.


중국의 오랜 고대 사상들을 자신의 독법으로 해석하고 열변을 토하셨을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글들을 읽으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세상으로 나온 뒤의 일이지만, 그의 <독법/讀法>은 이미 오랜 수감생활 동안 이루어져 왔던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책을 읽는 데에 오직 하나뿐인 특별한 법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독서를 위한 좋은 여러 지침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특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 흔히 다독(多讀)을 추천합니다.

선생님은 '다독'을 많은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한 권을 많이 읽는 것으로 권합니다.

많은 책을 읽는 다독이 때론 잡독(雜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잡다한 지식 쌓기로 남들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많이 읽는 다독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합니다.

많은 책을 소유할 수 없는 감옥에서는 한 권을 읽고 또 읽는 다독이 일상입니다.

감옥에서는 한 권을 '다독'하는 게 최적입니다.


나는 독법(讀法)이 독법(獨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자신만의 사고를 고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읽을 수 있고, 스스로 깨쳐 나갈 수 있고, 스스로 자기(自)의 이유(由)를 달 수 있는 자기 해석이 필요해 보입니다.

여러 고전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꿰어내고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밖에서는 해설서에 기대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안에서는 원서를 보고 또 보는 시간의 여유를 갖습니다.

시간이 있어서이기보다는 혼자의 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독법(讀法)이 독법(獨法) 일 수 있으려면 자신만의 주장과 고집으로는 안됩니다.

'나'의 풀이와 해석에 '너'의 긍정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나'의 이해가 쉬어야 합니다.  


감옥에서 독서는 남을 가르치기 위한 '인용'이 필요치 않습니다.

감옥에서 나의 독서는 내일의 남을 위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는 나의 내일에 '남'을 두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읽고, 지금 여기서 성찰과 각성을 구하는 '나'의 이해와 깨침의 해석이 주류입니다.


'너'를 가르치려는 독법(讀法)이 아닙니다.

'나'를 가르치려는 독법(獨法)입니다.


선생님의 '우리'를 가르치는 <강의>와 동양고전독법(讀法)은 그의 오랜 수감생활 <혼자> 풀어내야만 했던 독법(獨法)의 날들이었음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머리로 읽는 문·사·철(文·史·哲) 보다는 가슴으로 읽는 시·서·화(詩·書·畵)를 더 많이 읽으라는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당부처럼 들렸습니다.


순간 루쉰의 <투창과 비수>가 떠올랐습니다.

적에게는 투창(投槍)을, 자신에게는 비수(匕首)를 향하라 했던 말입니다.


나는 이전에는 투창만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를 향한 비수를 스스로 가슴에 품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에 적을 향했던 투창이 나에게로 돌아와 비수가 된 듯합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다 읽고서,


나에겐 문·사·철(文·史·哲)이 투창이라면,

시·서·화(詩·書·畵)는 비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둘을 딱 자를 기준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밖으로 향할 적을 두지 못하고 사방 벽에 갇혀 나 혼자만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종종 「세계문학」 책들을 마주치곤 합니다. 전집(全集) 모두는 아닙니다. 중복되는 몇몇 책들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호손의 <주홍글씨>,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 안토니오 그람시 <감옥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책 제목들만 보아도 그러려니 싶습니다.

안에서 구매를 했는지 밖에서 들여보내 준 책인지는 모릅니다.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 읽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죄와 벌>이 방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지나 보이는 청년에게 부모님이 들여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새로 구매해 보이는 완전 새 책입니다. 며칠이 지나도 청년은 들여다보질 않습니다.     


“안 읽니?”

“안 읽을 거예요.”

“...”

“뻔하죠. ‘죄를 지었으니 벌이나 잘 받아라’는 거죠.”

“...”

“보실래요?”     


그렇게 갑작스레 <죄와 벌>이 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억도 흐릿합니다. 끝까지 읽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번에는 기회도 좋고 나름의 의미도 있습니다.


청년에겐 그래도 부모님의 마음이니 잘 받으라 하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내 속엔 다른 마음이 있어서였습니다.

새 책, 그것도 남의 책이어서 그랬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 밑줄도 긋고 여백에 내 생각도 적는 게 버릇입니다.

여기서는 더 꼼꼼합니다.

그래서 지난번 당신에게 옥바라지 하나를 부탁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죄와 벌>과 함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3>까지 당신은 딸려 보냈습니다.

한동안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방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비수(匕首)를 더 가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어부는 ‘물 들어온다. 배 띄워라’라고 한다지요.

늘 있는 바닷물의 들고 나는 것에서도, 저마다 자기 일을 택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봅니다.

나는 썰물에는 걱정, 근심을 띄워 보내렵니다.

밀물에 마음을 두면 만사를 믿고 놓아두려는 여유라도 채우려고 합니다.

        

시는 외운다.
소설은 외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길이 때문만은 아니다.
시는 단어와 문장이 남지만,
소설은 문장이 아니라 인물을 남긴다.


언제가 형님이 들려준 말입니다.

여기 와서 소설을 읽기는 처음입니다.

혼자 남은 나에게 어떤 인물들이 내 곁에 남게 될지 자못 궁금하고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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