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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Feb 28. 2024

어린 여우와 씨과실

화수미제(火水未濟), 석과불식(碩果不食)

귀는 닫을 수 없지만,

입은 다물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나의 말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밖에서는 쉽지 않았지만, 안에서는 어렵지 않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는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종일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어제 잤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다시 눕기까지 종일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곧 기결수(旣決囚)가 되면 책을 읽을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도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출소 후 독보(獨步) 여행기(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입니다.


마냥 걷고 싶어서인가 봅니다.


소설처럼 계속 읽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 서너 곳의 여행기를 읽습니다. 읽었던 한시(漢詩)들도 두세 편씩 읽습니다.


한시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다음에 출소 후 독보를 할 수 있다면 멋진 곳에서 당신에게 한시 한 수 읊어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여행 편지글들과 전국의 사찰, 암자 기행문들을 읽을 때마다 봄날에 초원을 걷는 느낌입니다.



지난봄이 생각났습니다.

감옥에서 혹독한 첫겨울을 보내고 맞았던 첫봄이었습니다.

아침 운동시간에 나가면 좁은 운동장 담벼락을 따라 걷습니다.

아침 햇살이 옥담 위 철조망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옵니다.

운동시간이 주마다 달라서 햇살이 키가 높은 날에는 옥담 구석에서 까치발을 들고 햇살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 옥담 아래 노랗게 피어나고 있던 작은 민들레 꽃을 발견했습니다.

어디에나 피던 민들레여서 부러 꽃밭으로 옮겨 심지도 않았던 꽃입니다.

아무 데나 피는 꽃이라서 어디에서라도 쉽게 보던 민들레였습니다.


아무 데나, 어디서나 피는 꽃이라서

아무나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감옥 안으로 민들레만 들어올 수 있었나 봅니다.


밖에서는 널려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것이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갇히고 보니 아무 데나, 어디서나 널려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옥담을 넘어와 내 눈 안으로 들어온 민들레가 반갑고 고마웠다가 순간 너무도 미안해서 울컥했습니다.


한참을 보다가 그 자리에 두고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매일 민들레를 보는 일이 나의 운동시간을 보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조금씩 자라던 모습과 노랗게 피고 하얀 솜꽃이 되어가던 모습들을 관찰하듯 지켜보았습니다.


민들레 홀씨들이 하나씩 날아가 버리고 옥담 아래로 푸른 풀들이 제 키들을 높일 때,

나도 민들레 홀씨가 되어 그곳을 떠나 왔습니다.


그날로 나는 민들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가사를 다 외우지 못했던 ‘민들레 홀씨 되어’ 노래를 기억나는 부분만 속으로 반복해서 흥얼거렸던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선생님의 여행기를 읽는 중에 내가 다녀왔던 곳을 읽을 때는 마치 동행하는 느낌입니다.

그중 한 곳이 모악산 금산사입니다.

특히 모악산은 선생님이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철창살 사이로 늘 보았던 산이었다고 합니다.

출소 후 다시 찾은 감회가 다른 곳들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에서 선생님은 미완(未完)의 역사가 주는 참뜻을 알려줍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선생님이 ‘과학’이라고 하신 의도가 주역(易經)이 단순한 점책(占冊)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하신 것을 미루어 짐작했습니다.

선생님이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을 보고, 백제 미완의 미륵신앙에서 역경(易經)을 꺼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역의 마지막 괘인 64괘 때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小狐汔濟 濡其尾(소호흘제 유기미)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꼬리를 적신다.     


‘마지막의 실수’를 경계하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내용뿐 아니라 주역의 가장 마지막에 미완성(未完成)의 괘를 배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 때문에, 이 미제(未濟) 괘가 주역의 가장 마지막이 된 이유라고 해석합니다.     


선생님의 <강의>에 나오는 동양고전들은 각 고전의 내용 모두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동양고전 숙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출소 전 마지막에 <주역>을 읽는 순서를 정해놓았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미리 본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스포’라고 하지요. 그러니 나의 <독서 숙제> 마지막 <주역>을, 그것도 마지막 괘를 미리 스포일러 하는 것 같아 머뭇거렸습니다.

물론 <주역>의 내용과 풀이들을 다 읽지도 못했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주역>을 다 알지 못하지만, 위에 옮긴 <주역>의 마지막 괘에 대한 감명이 깊어서 전하고 싶은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내 모습이 보여서 그랬습니다.


회갑(回甲)이 인생을 다 산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강을 다 건넜다는 자만(自慢)에 꼬리가 적신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한겨울 꽁꽁 언 계곡 길을 걷다 발이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던 대로 걷다 보면 일어날 일입니다.


나는 꼬리를 적신 ‘어린 여우’가 아니라, 이미 ‘늙은 여우’가 깊은 구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여길 때였습니다. 그렇게 끝나버린 마지막에 모두를 잃어버렸다고 할 때 읽은 글입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기수 선생님이 이제 갇혀 살아갈 내 어깨를 다독이시는 듯했습니다.

‘실패’를 당연시하고 억지의 미화(美化)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이 마지막 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라는 것에 주목합니다.

금번에 알게 된 주역 풀이에서 이 괘의 모습은, 불(火)이 물(水) 위에 있는 형세(形勢)입니다.

그러니 ‘다 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우가 온몸이 강물에 다 빠진 것도 아닙니다.      


미완(未完)에 통한(痛恨)을 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미완이 완성의 직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다시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예 다른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봅니다.


한겨울 언 계곡물에 빠졌던 등산화를 마를 때까지 계속 신고 산행하지 않습니다.

산행이 늦어진다 해도 등산화를 말려야 합니다.

동계비박산행의 무거운 배낭 안에 버너가 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할 때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준비를 생각합니다.



시골에 가서 돌담 위로 커다란 감나무를 보았습니다.

겨울 앞인데 서너 개 감들이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까치밥이라 남겨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까치들이 와서 먹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선생님이 <주역>에서 가장 좋아하셨다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을에 과실수 열매들을 수확하고 큰 과실 하나 남겨둔다고 합니다. 나뭇잎을 다 떨군 가을의 미완은 마지막 과실 하나 남깁니다. 이를 다음 해의 씨과실(碩果)이라 여겨 남겨두고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화수미제에서 석과불식을 떠올립니다. 

미완(未濟)에서 새로운 시작(碩果)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당장 <주역>을 처음부터 읽어볼까 싶다가 서두르는 나를 말립니다.

감옥에는 룰이 있습니다.

순서입니다.

군대에 짬밥 순이 있듯이 감옥에도 들어온 순서대로 자는 자리와 일들이 정해집니다.

감옥에 들어올 때 나이는 영치한다고들 합니다.

감옥에서는 나이순이 아닙니다.

나는 나름 감옥에서 나의 독서의 순서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들어온 순서대로지요.




어제는 당신이 들여보내 주는 책들이 아닌 교도소 내 비치 도서들이 들어왔습니다.

먼저 들어왔던 책들도 있지만, 소내에서 빌려보는 책은 기한이 있어서 먼저 읽어야 합니다.

소내에 비치 도서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주문은 한 사람당 3권입니다. 기한도 있습니다. 주문해도 다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문한 3권 모두 들어왔습니다. 주문이 몰리는 책이 아닌가 봅니다.

<연암을 읽는다>, <키워드로 읽는 중국의 역사> 그리고 <인디언과 함께 걷기>입니다.     


<키워드로 읽는 중국의 역사>는 오천 년의 중국 역사를 중요사건 중심으로 엮은 책인데, 반나절 만에 다 읽었습니다. 메모를 위해 주문했던 책입니다.

때마다 검색할 네이버가 없으니 동양고전들과 한시들을 읽을 때 긴요했던 것들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별도로 노트에 기록하며 급히 다 읽었습니다.

감동의 밑줄 하나 그어 놓은 건 없습니다.

내 책이 아니니 여백에 적을 것도 없습니다.     


오늘 오전에도 한시(漢詩)와 성경을 읽고, <나무야, 나무야>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선생님이 강화도 서쪽 끝 하일리(震逸里)에 갔던 이야기입니다.

마을 이름은 ‘저녁노을’ 때문입니다.


조선 사대부 사람들의 공소(空疏)한 논쟁과 붕당에 등을 돌리고 강화로 몰려온 당대 학인들이 형성한 강화학파의 본거지를 찾았던 겁니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학자들보다 저녁노을에 대한 선생님의 통찰입니다.


나는 긴 산행 중 능선에서 바라다보는 일몰을 좋아했습니다.

반야봉 일몰이 압권입니다.

선생님은 하일리에서 산이 아닌 바다에서 일몰을 바라다봅니다.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일몰’이 그 어떤 패배의 징조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준비하는 예언의 확신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화수미제, 석과불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이 신뢰를 받으려면 예측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믿음의 강요가 아니라, 믿음직해야 신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곤륜산을 하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천 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선생님이 중국 한대(漢代) 장건의 시(詩)를 인용한 것입니다.

갑자기 눈이 커지고 흐뭇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어제 <키워드로 읽는 중국역사>에서 읽었던 장면입니다.

한나라 때 북방 흉노족의 침략으로 주변국들과의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 갔던 신하가 장건(張謇)입니다.

그가 걸었던 기원전 139년 서역으로의 원정길이 실크로드가 되었다고 읽었던 겁니다.     


참, 신기하지요? 처음 보았던 그 한 사람이 어떻게 내 기억에 남았기에, 선생님의 글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고 반가워하고 있으니까요.

마치 선생님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길고 긴 길을 걸었던 이였기에 길고 긴 황화의 시작과 끝을 시(詩)로 읊을 수 있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라고 일러 주십니다.


장건이 바라본 황화의 잠류와 선생님이 하일리에서 바라본 일몰의 예언은 화수미제와 석과불식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나는 걸어온 지난 길들에서 회오(悔悟)를 읽고,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을 준비하는 각오(覺悟)에 밑줄을 긋습니다.


난 길마다 당신과 함께했습니다.

앞으로의 길에 당신에게 다시 그리고 새로 손을 내밉니다.


    


오늘 오후부터는 <인디언과 함께 걷기>를 읽고 있습니다.

‘평화의 마을’(미국 버몬트주의 호프산 아래 세워진 체로키 인디언족 전통에 따른 이상적 마을)에 매년 7월, 여러 인디언 부족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깃털 두 개 달린 모자를 쓴 조 워싱턴 노인과 몸집이 거대한 천둥구름, 동화책 속 인디언을 꼭 빼닮은 성스런샛강, 굵은 음성의 아파치족 일곱마리매와 엔리게타 그리고 나니키” 등이 오랜 자기네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새벽별’은 ‘바람위를걷는자’라고도 불린답니다.


이야기들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겨집니다.

오래전 보았던 ‘늑대와 함께 춤을(Der mit dem Wolf tanzt)’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당신과 아이들 한자 이름들을 풀어서 서로 불러주는 생각을 해보니 재밌습니다.


인디언의 이야기들을 당신에게 편지로 다 전할 수 없어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금은 못하지만, 출소 후 집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당신과 아이들과 둘러앉아서 들려줄 수 있는 어느 별 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선생님이 인디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인디언들은 한참을 서서 뒤를 돌아다본다고 합니다.

아직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린다고 하셨지요.


당신은 내 편지가 ‘기승전 선생님’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감옥에 있어 보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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