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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Mar 06. 2024

연암을 읽는다

The Sound of Silence

교도소 비치 도서를 빌려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좋아했습니다.

순간 그런 내 감정과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좋은 일, 기쁜 감정은 수인(囚人)이 감옥에서 소유할 수 없다고 스스로 굴레를 씌웁니다.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전하는 일은 더더욱 할 게 못 됩니다.


‘잘 있다’는 말은 매일 해야 하면서도, 그래도 되는지를 매번 속으로 되묻기도 합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고,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이라고 했던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물은 흐름이 생명입니다.

사방이 갇힌 감옥에서 ‘흐르는 불편’을 생각합니다.


감옥에 들어와 한동안 생각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진정되지 않는 감정들은 편안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편안함을 찾으려고 성경과 고전, 불교책들을 읽었습니다.

마음의 분진을 가라앉히는 일은 쓸 수 없는 손을 거두는 일이었습니다.


편안함이 안주(安住)는 아닙니다.

감옥을 무기(無期)의 거처로 삼을 사람은 없습니다.


감옥의 첫날부터 반복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감옥의 일상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선 듯한 모습 같아서입니다.

반복을 지우는 일은 움직이는, 흐르는 강물이라고 깨닫습니다.


움직이는 ‘불편’을 피하는 ‘편안’은 포기하고 멈추는 일입니다.


안주(安住)는 흐르지 않는 집착(執着)일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흐르는 강물’은 "잠들지 않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깨어있는 물입니다.

희망과 목표를 향한 믿음이 잠들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기억의 한계는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일의 희망이 믿음직하려면 어제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어젯밤 잠들지 않아야 합니다.


편해진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과 닮아 보입니다.

감옥에서의 첫날, 첫 달의 불편함이 출소 날까지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날까지 잠들지 않고 깨어서 내일의 희망으로 흘러가는 불편함을 찾아보려고 봅니다.




오래전 형님은 ‘불편하게 살기’를 해보자 했지요.

라다크로부터 <오래된 미래>를 배워 보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파트를 떠나 시골 폐가에 가서 함께 ‘불편하게’ 살기도 했었지요.


나는 이제 감옥에서 오래된 선인들을 찾아가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연암을 읽는다>

교도소 비치 도서 목록에서 제목만 보고 신청했습니다. 연암을 처음으로 읽어 볼 기대감이 컸습니다.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호질... 연암과 책 제목들만 나열하며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연암에 대한 극찬의 들을 여러 책에서 보았습니다.

제목 <연암을 읽는다>처럼 이제 하나씩 연암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연암의 짧은 산문 스무 편을 엮은 한글 해설집입니다. 처음 읽는 나에게는 친절한 안내서입니다. 원문이 없어서 읽기는 쉽지만, 연암이 골라 쓴 한자에 대한 궁금함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가 다산(茶山) 이야기를 많이 해서인지, 당신은 다산 이름만 들어있으면 형님 서재에서 빼내어 보내주었나 봅니다. 오늘 네 쌍둥이를 다산(多産)하듯, 다산문학선집(茶山文學選集), 다산산문선(茶山散文選), 다산시선(茶山詩選), 다산논설선집(茶山論說選集)이 내 품에 안겼습니다.


이제 연암을 읽으려는 때에 형님의 손때 묻은 다산의 책들을 봅니다. 빛바랜 책은 강진 초당의 냄새를 갖고 있습니다. 곳곳에 쓰인 형님의 필체들이 내게 보내는 편지글들 같습니다.


하나씩 읽다 보면 읽을 게 너무 많습니다. 아니, 참 많습니다.

서양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조선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는 연암의 글을 읽었습니다.

연암이 누군가의 서재 이름을 지어줄 기문(記文)을 적어주면서 했던 말입니다.

보이는 게 죄다 물이면 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는 그동안 읽어오며 가슴에 새겨둔 무(無), 공(空), 허(虛)를 꺼내어 봅니다.

연암은 서재에 잔뜩 책만 쌓아 놓고 그 안에서만 있으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로 했던 말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이곳에서 옛 책들만 쌓아가다 보면 내가 물고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더는 세상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면서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항상 겹쳐 있습니다.


어제 읽은 연암의 글 중에서 순간 감탄을 내게 했던 대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의 문인 벗들과 당시(영조) 서울 종로, 청계천 주변을 통금시간이 지나, 술과 함께 배회하다가 수표교에서 새벽을 맞이합니다. 당일 저녁의 모습과 동선들을 자세히 묘사하는 글에서 나는 연암에게 처음으로 반했습니다.

옮겨 적습니다. 나의 풀이는 사족(蛇足)입니다.


“우리는 이번엔 수표교로 가서 다리 위에 쭉 벌여 앉았다.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우는데 참으로 발그레하고, 별빛은 둥글고 크게 보이는 게 마치 얼굴에 쏟아질 듯하였다.

이슬은 무거워 옷과 갓이 다 젖었으며,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비껴 흐르다 천천히 북쪽으로 가는데 도성 동쪽의 푸른 산 기운은 더욱 짙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를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엄격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이는 것 같고, 닭 우는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비의 목소리 같았다.”


어떤가요?

내가 어떤 설명도 덧붙이는 게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닭 소리가 정말 너무도 똑같이 들리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내가 감탄한 것은 그의 글 이전에, 어떻게 밤을 지새우며 술에 취해서도 렇게 글로 지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연암을 찾았습니다.

교도소 복도 작은 책장에 있던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고전소설 45>입니다. 운동을 다녀오면서 가져왔습니다. 곳곳이 뜯겨 있습니다. 연암의 글은 남아 있었습니다.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중고생 때에 제목으로만 외웠던 것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그렇게 짧은 글 일 줄도 몰랐습니다. <열하일기>에 들어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호질(虎叱)>은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게 아니라 지금의 <교수신문>에 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열하일기>를 읽고 싶지만 좀 더 미뤄 두렵니다. 전에 말했듯 이곳에서 세운 나의 독서의 룰을 지키려고 합니다.


연암의 글을 소리 내어 읽지는 않지만, 문장이 소리 내어 들리는 듯했습니다.

연암이 들었던 소리들을 따라 듣다가 <인디언과 함께 걷기>에서 읽었던 인디언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인디언은 자신들의 조상들뿐 아니라 지금도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새와 물소, 고래와 나무들, 별과 바람 그리고 시냇물과도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만이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인간은 대화가 불가한 경우가 가능한 경우보다 비교도 안 되게 많아 보입니다.

내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인사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훨씬 많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인과의 대화는 내가 새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를 말하는 한나라의 사람들끼리도 서로 대화가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소통 부재는 대화 불가입니다.


가치관의 차이가 대화를 차단한 소통 부재의 상황과는 다른 것도 있습니다.

실재하는 소리와의 물리적 소통 문제입니다.

안 들린다고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라디오를 켜서 주파수를 맞추면 그 진동의 파동에 따라 음악도 뉴스도 알아듣게 됩니다. 

모든 소리에 맞는 주파수를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소리는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소리도 있습니다.



물리적 파동의 소리를 인간의 이해로만 들어서는 대화가 불가합니다.

고래가 내는 소리를 인간의 주파수 언어 코드로 읽어 내는 일이 그렇습니다.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 해도 언제나 ‘졸졸졸’으로만 듣습니다.

나무나 별이 내는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던 자연의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소리는 셀 수도 없을 겁니다.

자동차 바퀴 하나 굴러가는 소리는 들으면서도 지구와 태양이 움직이는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소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박쥐는 볼 수 있습니다.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없어서 소통이 불가한 게 아니라, 없다고 해놓고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어떤 영적-그것이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든 또는 없든-인 소리, 또는 침묵의 소리, 아니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도 소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오랜 자연과의 합일입니다.

반려동물과 오랜 사귐과 사랑처럼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숲에 살았다던, 숲속의 온갖 나무들을 두 팔로 안고 사랑하고 입 맞추고 귀를 기울여 왔던 인디언 할아버지는 언제나 키 큰 나무가 저 숲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전해준다고 말합니다.


연암은 그날 수표교에서 소(訴)를 제기하던 개구리 소리, 글을 읽던 매미 소리 그리고 간언(言)하던 닭 소리를 그리 술에 취해서도 알아들었습니다.


연암은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구름과 바람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당신이 전하는 말을
옥담 안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잘 읽다 보면
어느 시절 인연에
잘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질문 속에서 삽니다. 

누구도 알아듣게 말해 주지 않습니다.


아, 지금 밖에 있다면 노래 두 곡을 듣고 싶습니다.


수많은 질문에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밥 딜런은 온 세상을 다녀 본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고 노래했지요.



어둠을 오랜 친구로 둔

사이먼과 가펑클은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로 노래합니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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