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耳鳴)과 비한(鼻鼾)’
한 방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감옥에서 수용자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을 각기 다른 방들로 떼어내 배치한 겁니다.
여기서는 ‘방이 깨졌다’고 합니다.
수용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방으로 쫓아내려고 ‘방을 깨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결수(未決囚) 사동에서는 방의 식구들이 자주 바뀝니다.
항소심을 마치고 기결수(旣決囚) 사동으로 전방을 가거나, 다른 교도소로 이송을 가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나가면 방이 넓어졌다고 좋아합니다.
하루도 안 되어 한 사람이 다시 들어옵니다.
신입을 반기는 이는 없습니다.
신입 아니었던 이는 없습니다.
감옥에서 만남과 헤어짐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처음 갖는 만남이고 마지막 헤어짐만 반복입니다.
반가움과 아쉬움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래도 밤새 나를 지켜줄 이는 이들밖에 없습니다.
재판을 앞두고 서로 마음이 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편하지 않으니 남에게 편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종일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서 그렇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서로 살아온 생활도 다른 이들이 한 방에 종일 있어서 그렇습니다.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하는 이들은 일보다 사람 관계가 힘들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게 힘든 일입니다.
감옥이 힘든 것은 24시간 사방이 갇힌 좁은 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불편을 없애는 일은 다른 사람을 ‘다르게’ 보려고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송 와서 신입으로 들어온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최고선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긴 장마가 지나갔습니다.
지구가 끓지 않는 이유는 장마가 있어서라고 합니다.
비를 맞지 않은 여름은 처음입니다.
비가 온 땅을 적셔도 감옥 안은 메말라 있습니다.
지난주 신입이 왔습니다.
노인입니다.
신입은 누구든 처음 하는 일들이 서툽니다.
젊은이들과 부딪힘이 잦습니다.
노인 신입은 잠잘 때 코골이가 심합니다.
모두가 잠을 못 잡니다.
젊은이들이 밤중에 일어나 허공에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합니다.
결국, 어제는 일이 서툰 노인에게 젊은이가 반말한 것으로 싸움이 났습니다.
곧장 교도소 기동대가 와서 방 식구 모두 진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방이 깨졌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만났고 헤어졌고 또 새로 만났습니다.
‘코골이’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2백 년이 지난 글입니다.
연암은 책 속에 여전히 살아서 우리 방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장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명(耳鳴)에 걸린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나 지적하는 단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코골이 병인 비한(鼻鼾)에 걸린 사람이다”
귀속에 뭔가 ‘앵앵’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명(耳鳴) 현상은 자신은 잘 들리지만 남은 전혀 듣지 못합니다.
반면에 코골이는 자신은 듣지 못하지만 남은 잘 듣습니다.
연암의 가르침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이명을 앓고 있는지, 혹은 비한에 걸렸는지를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닌 너에 대한 나의 문제입니다.
나는 다른 이의 이명을 듣지 못합니다.
남은 아니라는 코골이를 나는 들었다고 우깁니다.
내가 나를 문제 삼을지, 남을 문제 삼는 나를 문제 삼을지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혼자 읽고 혼자 쓰는 내가 이명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혼자 생각하는 날들이라 내가 비한에 걸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내가 듣지 못했던 남의 이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주먹 쥔 손을 올려 남의 코골이를 향했던 외침이 언제나 정당할지에 대한 물음들도 이어집니다.
연암의 ‘이명과 비한’의 비유에서 전에 깨달았던 ‘성낼’ 진(嗔) 자(字)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명에 걸리면 남들은 안 들린다고 하지만 나는 분명히 듣습니다.
내가 ‘참(眞)’이면 나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비한 이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분명히 듣고 있고, 내게 확실히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명과 비한의 치유는 나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연암은 이전에 있던 여러 일화를 가지고 다른 비유를 이어갑니다.
위태로운 상황을 가리켜 ‘소경이 애꾸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라는 옛말에 대해서 연암은 말합니다.
“소경을 보는 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움을 여기는 것이오. 소경 자신이 위태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위태로운 바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뭐가 위태롭단 말인가?”
연암은 눈을 감아서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이 오직 눈 하나만 믿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위태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보고 듣고 있어서 ‘있다’라고 하고,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없다’라고 하는 나의 ‘참(眞)’이 화(嗔)로 이어지는 연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소경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과 눈 뜬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자는 자신의 인식 문제고, 후자는 타자의 인식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은가에 대한 일반의 궁금점과 질문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연암의 뜻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이를 두고 예수의 제자들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자신의 죄 때문인지를 선생에게 묻습니다.
선생은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하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줍니다.
현재 고난은 과거 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이해합니다.
한 발엔 짚신을 신고 다른 발엔 가죽신을 신고 말을 탄 이에게 옆에서 취했다고 말합니다.
연암은 보는 사람의 방향에 따라 한쪽에선 짚신을 신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가죽신을 신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하지요.
말 앞에서 보아야 양발에 서로 다른 신을 신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도(中道)가 단지 가운데 서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게 그대로 사실인 것은 맞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변치 않을 진리(眞理)는 아닙니다.
일리(一理)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말똥구리는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은 말똥구리의 똥덩어리를 비웃지 않는다는 연암의 말로 마칩니다.
이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편지에 다 옮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연암이 장자와 많이 닮아 보이는 느낌입니다.
9월이 되면서 새벽엔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왔나 싶습니다.
한여름의 폭염은 기억에 없고 아쉬운 장마만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만 느끼는가 봅니다.
눈으로 보고 싶지만 연암의 말로 되새기며 아쉬움을 달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