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절필동 Mar 28. 2024

편지에 담는 뜻과 버리는 말

<금강경>과 장자(莊子)

내가 당신에게 보내줄 선물은 편지밖에 없습니다. 


기다리는 당신에겐 받아 든 봉투의 두툼함이 주는 첫 기쁨이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두툼한 선물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에 요즘 나의 편지가 늘어져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혼자 말하고, 길게 말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사람처럼 편지글이 길어져 두툼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적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들었던 생각과 느낌을 펜으로 옮기면 펜이 생각과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앞서가는 생각과 말을 잇다 보면 한 문장이 마냥 길어지기도 합니다. 

손으로 쓰는 편지여서 고칠 수도 없고 버리지도 못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이메일과 문자에 익숙했던 내가 손편지로 쓰고 있는 지금의 불편함을 말할 형편은 못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드는 감상들을 노트에 때마다 적어둡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편지에 옮겨 적습니다. 

책의 글자로 읽은 감상은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이를 다시 편지에 글자로 옮겨 적습니다. 

그림의 물감들이 다 마르지 않아 편지글이 번지고 흘러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린다고 다 그려지지도 않고, 쓴다고 다 써지지도 않습니다.     


내가 감동한 선문(禪文)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대로 적어놓으면 말 같지 않아 보이고, 마음에 칠해진 그림을 글자로 풀어놓으려면 선오(禪悟)는 모두 휘발(揮發)되고 맙니다.     


전하고 싶지만 다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마음이 다 전해지는 것도 아닐 겁니다. 

반드시 전해야 할 일도 아닌 듯합니다. 

함께 같은 것을 같이 느껴야 할 강제도 필요치 않아 보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그리움에 그려지는 사랑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신 선생님이 감옥에서 보냈던 봉함엽서의 깨알 같은 글씨들에는 하나의 오타도, 수정도 없습니다. 

당시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검열이 있던 때입니다. 

교도관 앞에서 짧은 시간에 철필로 꾹꾹 눌러가며 쓰셨다고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쓰지 못했을 것을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한 달간 쓸 편지내용을 혼자 머릿속에서 교정을 마쳤다고 합니다.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다 읽었습니다. 

다 읽었다고 해서 그 모두를 다 이해했다고는 못합니다. 

오랜 불자가 아니고서 불교 경전을 혼자 읽고 이해하기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유명 관광지에서 전문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합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온 뒤 국내 여행길이 답사기행으로 바뀌게 됐던 날들이 기억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한 문장이 갔던 곳을 다시 찾는 발걸음이 되게 했습니다. 

그제야 처음 가는 곳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종교의 경전은 일점일획이라도 빼거나 덧붙일 수 있지 못합니다. 

경전은 한 권이지만 해설서는 끝이 없을 겁니다. 

<금강경>을 처음 읽었고 해설서도 도올의 강해뿐입니다. 

또 다른 해석들이 많을 것을 도올의 해설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나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럴 이유를 원치도 않습니다. 

다만 내 마음에 드는, 꽂힌 문장을 나의 이해로 삼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 전할 수 있는 것도 못됩니다. 

다만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만 남습니다.


어느 글이든 읽을 때 반가움이란 게 있습니다. 

반가움은 친근함입니다. 

친한 벗은 오랜 벗입니다. 

이전에 읽은 글을 다시 다른 책에서 읽게 될 때 갖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지아설법(知我說法) 여벌유자(如筏喩者) 법상응사(法尙應捨)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강을 건너 저편 언덕-피안(彼岸)-에 오르려 뗏목을 타고 갑니다. 

언덕에 다다르면 뗏목을 버리고 언덕에 올라야 합니다.     


<장자, 외물편>에서 읽었던 글과 닮았습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라(逢祖殺祖)“


불교 선종사(禪宗史)에 내려오는 유명한 말이라고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고 오른손을 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의 뜻이 글자에 있지 않음을 압니다.     

부처에 예수를, 조사에 목사, 신부, 교황을 집어넣고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올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 예수의 말을 가져옵니다. 

A=B라고 한다면 A가 더는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예수가 있고 또 길이 있다면 예수는 영원히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나의 무화無化 즉 무아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 예수의 죽음은 곧 <금강경>이 설하는 무아(無我)인 것이다. 즉 예수의 아(我)가 죽고, 예수의 말을 듣는 나의 아(我)가 죽을 때만 길과 진리와 생명은 현현하는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이 열반에 오르는, 깨달음의 궁극이라면 그 지점에 이르러서도 내가 부처가 됐다는 깨달음조차 잊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당장 죽일 부처와 예수를 찾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나를 죽인다는 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지난 편지에 ‘저 멀리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나의 손가락보다 작다’는 말을 적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들은 곧 나의 자리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 그 모든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본 것이라도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항상 같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것도 아닐 겁니다.     


내 편지글이 늘어지는 것과 당신이 받아 들 편지봉투의 두툼함을 기대하는 마음을 금강경을 읽으며 새롭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깨달음의 이야기를 편지에 담으려는 마음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분진을 가라앉히려는 나를 죽이려는, 아상(我相)을 편지에 담아보려는 마음이 길어지곤 합니다.


장자는,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답니다.


내 편지가 내 마음의 뜻을 두툼하게 전하려다 늘어지고 길어지는 말들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담았으면 합니다. 

짧은 단문의 편지글이 당신의 힘든 무거운 날을 가볍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읽고 찾는 일이 일상입니다.     

다 쓰지 못하는 검열의 감옥에서 한 자의 오타도 없이 쓰셨던 선생님의 편지를 다시 읽습니다.


뜻을 담고 버리는 말이 남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에서 받아보는 내게 온 편지입니다.

이전 10화 손가락보다 작은 나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