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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Apr 03. 2024

꿈과 조종(弔鐘)

꿈을 꾸었습니다.


감옥에서 꿈을 꾸었다고 특이한 건 아닙니다.

꿈에서 깬 다음에 감옥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꿈에 대한 생각이 오래 남았습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 꿈에서 깨어나면 ‘다행이다’라는 경험이 많았습니다.

꿈이 현실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다행(多幸)’이 아니라, 아쉬워하는 경우입니다.

꿈이 현실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은 복권을 사러 가는 걸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꿈이 현실이기를 바라기도 하고, 현실이 꿈이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반드시 꿈이 희망(dream)으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현실이 감옥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난날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다시 보게 하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일은 없습니다.

꿈을 꿈으로, 현실을 현실로 직시하게 되는 날들입니다.

감옥에서도 날들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전에는 꿈도 없이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누워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찾던 일이었습니다.

전날 밤의 필름이 어디서부터 끊겼는지를 더듬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어젯밤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내일 아침 일어날 감옥이 꿈이 아닐 것을 압니다.

지나온 날들이 내일도 이어질 것을 압니다.

달라진 것은 지나온 날들이 나에겐 꿈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감옥이라도 어제의 감옥이 꿈같이 다가오는 것이 다행입니다.

어제의 감옥은 내일 다시 살아갈 현실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내일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지만, 어제의 현실은 내일의 현실이 아닙니다.

어제를 지났기에 어제는 꿈입니다.

내일이 되면 오늘이 꿈이었다 여기게 될 겁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보다는 겨울을 지나왔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불행을 지나온 사람은 행운을 앞에 두는 꿈을 꿉니다.

꿈은 반드시 앞에 두는 것만도 아닙니다.

악몽이 다행이라면, 지나온 불행은 다행인 꿈이 될 겁니다.


누구라도 행복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의 행복을 느끼는 이가 바라는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입니다.

희망은 바람입니다.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꿈입니다.

불안과 다르지 않습니다.

감추려는 게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면, 내일은 오늘이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직시합니다.

내일은 바람과 희망, 꿈이 아닙니다.

꿈이 희망이 되는 경우, ‘종교가 아편’이라는 말과 닮았습니다.

내일은 남으로부터 오는 게 아닙니다.

오늘 내가 만드는 것에 따라 다가올 결과가 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남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緣起)는 내가 이해하고 찾은 나의 꿈과 희망입니다.     



내 글을 읽었는지, 내 꿈을 꾸셨는지, 신 선생님의 오늘의 글은 당신의 감옥에서의 ‘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비교적 징역 초년의 일입니다만 밤마다 바깥세상에 관한 꿈을 꾼다면 몸은 비록 갇혀 있더라도 꿈을 꾸는 시간만큼은 감옥을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바깥세상에 관한 꿈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으니 가고 싶은 곳들이 매일 늘어납니다.

아무 때나 어디나 갈 수 있었던 밖에서는 마음과 시간을 내지 못했던 곳들입니다.

북한강입니다.

이른 새벽 시간입니다.

정태춘 님의 ‘북한강에서’ 노래 때문일 겁니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선생님이 출소 후에 북한강에 가셨습니다.

새벽이 아니라, “서울에는 없는 저녁 으스름” 시간입니다.

“노을에 물든 수면에 드리운 수영(樹影)과 수면을 가르는 청둥오리들의 조용한 유영(遊泳)”을 바라다봅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지면서 수면 위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다고 쓰셨습니다.

선생님이 오랜 감옥에서 실재가 아닌 꿈은 마치 북한강물에 비치는 “지극히 엷은” 그림자일 뿐,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에다 얼굴을 비치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라/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 선인들의 말을 꺼냅니다.


“아침이 되면 간밤의 꿈을 세숫물에 헹구어 내듯이 삶은 그 투박한 질감으로 우리를 모든 종류의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이라는 오늘의 모든 것 또한 꿈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을 보내야 하는 마음을 숨길 데가 없습니다.

머무르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꿈과 같습니다.

꿈에라도 머무르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는 꿈이기도 합니다.

감옥의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꿈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도 나가려는 충동을 내려놓으려는 자유의 꿈입니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어스름 시간에 절에서나 나올듯한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습니다.

절에서 어쩌다 한 번 치는 종은 아닐 텐데 처음 듣는 것이어서 환청일지도 모릅니다.

기억이 떠올라 <우리한시삼백수> 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시경(詩經) 삼백 편에 맞춰 신라-고려-조선-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한시삼백수>를 엮은 정민 교수 책입니다.

마지막, 제300번째 우리 한시의 주인공은 만해 한용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옥중에서 쓰신 것입니다.     



설야(雪夜) - 눈 내린 밤     

四山圍獄雪如海(사산위옥설여해)

衾寒如鐵夢如灰(금한여철몽여회)     

사방산 감옥 에워 누은 바다 같은데

찬이불 쇠와 같고 꿈길은 재와 같네     

鐵窓猶有鎖不得(철창유유쇄불득)

夜聞鐘聲何處來(야문종성하처래)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밤중의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철창으로 온 사방을 가둘 수도 옭아맬 수도 없는 게 있습니다.

무엇도 막을 수 없어 어두운 한겨울을 뚫고 들려오는 어느 산사 범종의 소리입니다.

그도 아니면 어제 죽은 자가 아니라, 오늘 듣는 살아 있는 만해만이 깨달음에 깨어나 풀려나 있었나 봅니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제목이 존 던(John Danne)의 시에서 따온 것은 나도 몰랐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를 듣고 ‘누구?’의 궁금이 아니라, ‘누구나!’를 알려줍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외딴섬이 아니다” 시인이 들은 소리입니다.

“한 줌의 흙이 파도에 씻겨가면 그만큼 대륙의 상실”이라는 문장이 마음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저 종소리는 단지 죽은 사람을 위한 소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종소리’가 될 것입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마지막에 나오는 무녀 소화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난리 통에 밤새워 굿을 마치고 나오는 소화를 김범우가 마주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만도 여기지 않는 날에 한밤을 지새우며 죽은 자를 위해 굿을 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굿이 아니지요. 산 자를 위한 굿이지요’ 소화의 말입니다.


어스름에 들었던 종소리는 어제 죽은 내가 아니라, 오늘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종소리입니다.


수인(囚人)의 하루는 수면에 드리운 수영(樹影)이 하룻밤을 지내면 사라지는 꿈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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