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
당신에게 매일 보내는 편지에 늘 안부를 묻지 않습니다.
안에서 밖의 걱정이 한시라도 없는 건 아닙니다.
늘 같은 마음이어도 매일 같은 말을 물을 수 없을 뿐입니다.
당신이 매일 기다리는 나의 편지가 지루한 반복이 되지 않으려고 나는 매일 새로 읽고 새로운 느낌들을 쓰고 있습니다.
사방의 벽은 나를 막지 않습니다.
내가 기대는 벽입니다.
내가 지탱해야 당신이 버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눈은 정작 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보고 믿어왔던 지난날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사방이 갇힌 감옥에서 먼 곳을 볼 수 없습니다.
시선이 다다를 곳이 누운 키를 조금 넘을 뿐입니다.
먼 데를 포기하면 가장 가까운 데를 볼 수 있는 곳이 감옥입니다.
혼자 있으니 내 눈이 나의 눈썹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감옥에 들어와서 가장 달라진 나의 독서는 무엇보다도 읽는 책입니다.
전에는 전공도서였지요.
남을 가르치기 위해 읽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읽는 독서는 나를 남 앞에 드러내는 준비였습니다.
이제는 가르칠 남을 내 앞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나를 가르치기 위해 읽습니다.
처음으로 읽는 책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배움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읽는 전공도서는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습니다.
어느 한 주제에 관해 여러 책을 비교하며 해당 부분만 집중해서 읽습니다.
서로를 비교하고 문제점을 찾는 일입니다.
나를 해결사로 드러내려는 작업입니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위 있는 학자의 문장을 따오기도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을 비판하기 위해 남의 말을 증거처럼 가져오는 경우입니다.
문제 제기와 비판의 논리를 객관과 주관으로 잘 버무리는 글쓰기였습니다.
나의 해석과 주장을 드러내려는 논문들이 주였습니다.
대부분의 글쓰기는 마감일과 제한된 원고매수에 갇혀 있었습니다.
지금, 몸은 갇혀 있지만 읽는 책과 당신에게 보내는 글쓰기는 자유롭습니다.
이곳에 들어와서 더욱 달라진 게 있습니다.
어느 책을 읽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을 비판할 자리에 있지 않은 수인(囚人)임을 되새기려는 마음이 앞서는가 봅니다.
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좋은 느낌만 들고자 합니다.
나의 비판이 끼어들 자리를 두지 않는 것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분야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한몫합니다.
소에서 빌린 <연암을 읽는다>를 다 읽고 반납했습니다.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아 공책에 적어 가면서 읽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서 드는 궁금점을 풀 길이 없습니다.
연암과 다산의 교류입니다.
당대 둘이 서로를 모르지는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내가 지금껏 읽은 다산의 글에서 연암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보지 못했습니다.
연암도 같습니다.
정조 옆에 다산과 함께 가깝게 있던 초정 박제가는 연암이 끊임없이 언급합니다.
노론이었던 연암은 소북이었던 정철조뿐 아니라, 서얼 출신 소북파 박제가, 유금, 유득공 등과도 상당히 가까운 친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남인계 이익, 이용휴, 이가환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나 봅니다.
이유 없는 게 없겠지요.
내가 모르는지, 그 둘이 그럴 연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도올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 항상 느끼는 게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해박한 지식의 방대함이고, 둘째는 언제나 빼놓지 않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당신 자랑입니다.
전에는 거북했지만, 지금은 그의 자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헤아리려고 합니다.
불교 전문가들 그 누구라도 읽어볼 텐데, 기존 불교계의 해석과 현 한국불교에 대해 거침없이 강하게 질타합니다.
마치 한국 불교계 대종사, 종정인 듯, 이름 있는 국내 최고, 최대 사찰 방장(方丈)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설(設) 할 뿐이다. 본 강해는 나 도올의 실존적 주석이다”라는 말씀이 당신만의 고집도 자기방어의 탈출구를 열어 놓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불자가 아닌 나도 <금강경>이란 말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에는 읽어 본 적도 읽어볼 생각도 갖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불교신문>과 여러 불교 관련 책들을 보다가 불교 경전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신문>에서 <팔만대장경>의 핵심이 <금강경>이고, <금강경>의 핵심이 <반야심경>이라는 글을 우연히 읽었던 겁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원제목이란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가 직접 불교경전을 읽고 싶다는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도올 선생님의 동양 고전 책들 모두는 입문서처럼 앞에 자세한 안내를 달고 있습니다.
단순한 설명은 아닙니다.
오직 도올만이 풀어낸다는 해석과 안내입니다.
이번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편지에 이 모두를 다 옮기지는 않습니다.
하나만 전합니다.
<도올의 금강경 강해>가 왜 <도올의 금강경 강해>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불교가 쓰고 있는 <금강경>은 세조의 <금강경언해>를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정본(正本)은 오직 한국이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 전 세계 최고(最古) 유일 가치인, 해인사 판본을 들춰 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올이 처음으로, 유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도올의 말만 듣고 나 또한 의아해했습니다.
불교계의 다른 입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금강경>이 최고의 지혜인 ‘반야’를 알려주는 경전이라고 하니 겸허한 마음으로 읽어보렵니다.
네이버와 구글 검색이 없으니 때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순간 답을 모르면 생각할 시간을 오래 가질 수 있습니다.
단점이 장점이기도 합니다.
없으면 못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르게 합니다.
전국 사찰 및 암자 여행기 관련 책들이 있습니다.
산을 좋아해서, 마냥 걷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한 편씩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도올의 금강경 강해> 안내를 읽다가 ‘해인사’를 알고 싶어서 가지고 있는 신정일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와 조용헌의 <사찰기행>을 펼쳤습니다.
두 책 모두 ‘해인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없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고운 최치원을 찾으셨던 신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를 다시 읽었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까지 만의 이야기지만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오래전에 스위스에서 기독교 관련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해인사였습니다.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나도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에 그들이 더 놀라워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기서는 기억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밖에서는 기억과 추억의 시간을 낼 시간이 없이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가 살아났다’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금강경>이 <팔만대장경>의 핵심이라면,
<금강경>을 한마디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제법무상(諸法無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네요.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하면서도 알아보려고 마음으로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
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는 머리로 깨우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금강경>은 마음으로 깨우쳐야 하나 봅니다.
혼자 검색 없이 속으로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갔습니다.
숙제로 남은 문장입니다.
만약(若), 견제상비상(見諸相非相)-모든 형상이 곧 형상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곧 여래를 보리라
검색할 게 없는 이곳에서 혼자 숙제를 풀고 있습니다.
다음 편지에 보내겠습니다.
아상(我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