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칼이 덤벼들거들랑 하이에나를 보여주고
하이에나가 덤벼들거들랑 사자를 보여주고
사자가 덤벼들거들랑 사냥꾼을 보여주고
사냥꾼이 덤벼들거들랑 뱀을 보여주고
뱀이 덤벼들거들랑 막대기를 보여주고
막대기가 덤벼들거들랑 불을 보여주고
불이 덤벼들거들랑 강물을 보여주고
강물이 덤벼들거들랑 바람을 보여주고
바람이 덤벼들거들랑 신(神)을 보여주어야지
신 선생님이 <계수님께> 보낸 편지글에 있는 <아프리카민요>라고 합니다.
대처(對處)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민요(民謠)는 솔로가 아니라 합창입니다.
민요는 한 시절의 히트곡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전승(傳承)입니다.
전승은 세대의 공통된 경험이 남긴 유산(遺産)입니다.
<아프리카민요>의 순서는 오랜 경험의 지혜입니다.
자칼에게 막대기를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신(神)이 등장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자칼에게 신(神)을 보여주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神)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교리(敎理)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장자(莊子)가 생각났습니다.
하루는 장자가 밤나무밭에 갔습니다.
커다란 까치 한 마리가 밤나무 가지에 앉았습니다.
장자가 화살을 겨누었습니다.
까치는 커다란 날개와 눈을 가졌으면서도 화살이 겨누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보였습니다.
맴맴 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매미를 봅니다.
그 곁에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습니다.
까치는 사마귀를 잡으려고 화살을 볼 정신이 없습니다.
이를 본 장자가 말합니다.
“아, 슬픈 일이다. 만물은 서로를 해치고, 이익과 손해는 서로 관계되어 있구나.”
장자는 활을 버리고 도망치듯 밤나무숲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밤나무밭을 지키던 주인이 도둑이 들었나 해서 몽둥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기 뒤에 주인이 든 방망이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 한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입니다.
이익을 탐내다 정작 자신이 처한 위험을 돌아보지 못함을 경계하는 교훈입니다.
<아프라키민요>는 자칼에게 하이에나를 준비케 하는 지혜이고,
<장자>에게는 하이에나에게 뒤에 사자가 있음을 알라는 지혜입니다.
<아프라키민요>는 더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물리쳐 위험에 대처(對處)하는 지혜를 말했다면,
<장자>는 내 뒤에 더 강한 것이 있음을 미리 알아 약한 것을 탐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처신(處身)의 지혜입니다.
둘의 정오(正誤)가 있는 게 아닌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때마다 대처와 처신을 아는 일이 우선일 겁니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서도 세상의 소식을 봅니다.
매일 끊이지 않는 사건, 사고는 날마다 새로운 소식(News)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보는 이마다 검사, 변호사, 판사의 역을 한 마디씩 합니다.
지역뉴스에 나오는 사건의 인물이 다음 날 옆방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사건 뉴스는 피하고 싶으면서도, 사고 소식은 불안한 마음에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TV에 <한국기행>이나 <인간극장>이 나오면 책에서 잠시 잠시 눈을 떼는 때들이 있습니다.
<한국기행>은 잠시라도 벗어남의 해방감을 줍니다.
마냥 걷고 싶은 곳들이 이토록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인간극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많은 경우 주름진 노부부의 삶의 이야기들입니다.
<한국기행>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자연의 길들을 보여준다면, <인간극장>은 그 굽이진 길들을 걸어온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한국기행>의 굽이진 길들은 <인간극장> 주인공의 주름을 닮았습니다.
굽이진 세월의 주름은 파이고 다져온 지난 삶의 자국입니다.
굽이야 굽이굽이가 저마다 한(恨)의 아리랑 가락들을 담고 있어 보입니다.
가장 빠른 길은 직선 길입니다.
물길도 굽이쳐 흐릅니다.
느린 물길이 생명의 강줄기인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산길도 곧은길은 없습니다.
산의 봉우리마다 한 번에 직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직선으로 오르는 암벽과 빙벽은 순간 추락의 위험을 언제나 갖고 있습니다.
그조차도 코스는 직선이 아닌 지그재그입니다.
노인의 주름은 삶의 세월입니다.
굽이진 주름의 세월은 느림입니다.
세월은 빠른 직선이 아닙니다.
세월을 재촉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황하만절필동(黃河萬折必東)
황하는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현대에 와서도 자주 써 온 말입니다.
쓰는 이마다 각자의 동(東)을 정하고 있습니다.
충신의 절개(節槪)로, 외교(外交)의 수사(修辭)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황하(黃河)를 빼도 무관합니다.
중원(中原)의 지대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서 모든 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를 것을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한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릅니다.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릅니다.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고 했습니다.
황하가 만 번을 ‘꺾는’ 것일지, ‘꺾인’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 번이 모두가 동(東)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꺾임’마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꺾임’마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동(東)이 아니었던 ‘꺾임’마다 있었을 수많은 비난과 수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의 성인(聖人)으로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에 대한 평가는 세계의 고전(古典)이 된 그의 유명한 사기(史記) 때문임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기(史記)를 집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 목숨을 건져야 했던 궁형(宮刑)을 택했던 사마천의 수모를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역사는 사마천의 궁형이 아니라 사마천의 사기라고 평가합니다.
신 선생님이 출소 후 가야산을 찾습니다.
고운(孤雲) 최치원을 찾아 나선 걸음입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 점필제 김종직(占畢齋 金宗直) 등 당대의 대유(大儒)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도 찾았다 하니, 선생님의 걸음이 가야산 단풍놀이가 아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홍류동 물가의 농산정에서, “사람을 읽는 자(尺)는 적어도 그 사람의 일생보다는 길어야 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만큼 넓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당신에게」 엽서를 띄웁니다.
나는 만절을 꺾여도 동해에 다다르는 황하를 떠올렸습니다.
황하만절필동(黃河萬折必東)을 말하려면 황하가 동해(東海)에 와서 풀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와 잣대는 그 사람의 일생보다 길어야 한다’는 문장이 가슴을 울립니다.
세 치 혀로는 한 사람을 잴 수 있는 자(尺)의 길이가 되지 못합니다.
한 날의 뉴스가 한 사람의 일생을 끝내기도 합니다.
세상의 자(尺)는 한 사람의 일생을 기다릴 세월의 길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수인(囚人)의 죄명과 형기는 그의 일생을 잴 수 있는 자(尺)가 되지 못합니다.